210-KR

사건기록 210-KR-1

‘깨어져버린 평화로운 오후’

“젠장! 이게 뭐야!”

실험-연구요원으로서의 생활은 꽤나 고단하다. 뭐, 재단 내의 어떤 직책이 안 그러랴만 D등급 인원이 아닌 게 어디야. 참여하는 실험에 따라 다르지만 실험의 요체는 ‘D등급을 얼마나 갈아 넣느냐.’이니까, 요원의 안전은 미약하게나마 보장받는 셈이다. 그리고 SCP를 이용한 실험도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늘처럼 연구팀이 모두 회식나간 차에 혼자 남아서 보고서를 마저 작성하고 커피향을 음미하는 한가로운 오후도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 ■월 ■일 ○… 오후 14시 13분경… [편집됨]. 우리 D등급 인원을 깔보는 듯한 재단 놈들의 눈초리가 오늘따라 더 짜증나게 느껴진다. 그놈들은 여기에 있는 것들이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라도 실험에 투입되고 나서 멀쩡히 돌아 나오는 일은 드물다…’

이따위 내용이 갈무리해둔 보고서에 멋대로 덧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쓰레기로 죽을 예정인 목숨을 더 살게 해줬더니, 몸이 없어지고도 우릴 괴롭히는군!”

이게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실험에 투입되어 D등급 인원에게 진정제를 맞췄던 게 나였고, 실험데이터를 정리해서 보고에 올린 것도 나였으니까. D- 몇이니 그따위 숫자는 잊어버린 지 오래고 그 일기인지 SCP 뭐시기의 일련의 사고도 ‘기억소거조치’로 일단락 된 줄 알았더니, 일이 터진 것이다.

보고서에 덧씌워지는 문장은 ‘주제에 잘난 척은…’, ‘[편집됨]’,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같이 죽자…’등 증오, 분노, 살해욕구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들이 소름끼치도록 거친 필치로 질주해 갔고, 큼지막한 글씨로 보고서를 다 채운 문장은 SCP의 실험내용 파일철, 인사목록으로까지 그 손을 뻗었다.
이쯤 되니 공포스러웠다. 저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다급해졌다.

“사령부, 사령부! 내말 들립니까? 이건 긴급 상황입니다! 그 빌어먹을 일기가 미친 속도로 전이되고 있다구요! 제길! 안들리냐고!!”

일반회선, 긴급회선, 상부로의 보고… 어떠한 시도도 헛된 것으로 돌아갔다. 연구동 건물 자체도 무슨 일인지 봉쇄되어있었다.

…중략…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잘난 보고서는 제쳐두고 회식이나 같이 나가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망할 일기가 하얀 복사용지 위로 써내려져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일기의 필치는 꽤나 침착해져있었다. 그 D등급 이름이 뭐였는지, 딸 하나, 아들 하나가 딸린 가정이 있는지, 아내가 프리지아화분을 좋아하는지 알게 뭐야. D등급 주제에…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금요일이다. 오늘 회식도 간만에 주말 내내 푹 쉬라는 독려차원에서 하는 거였지.

하하. 참 허탈하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실험 및 연구요원 L████
20██년 █월 █일 ○ 일기 마침.

연관된 SCP: SCP-210-KR
연관된 직원: 제 ██기지 연구동의 연구원 전원

날짜: ██/██/██ - ██/██/██

장소: 제 ██기지

피해내용 : ██기지내에 보안이 망가진 흔적이 있었고 SCP-210-KR의 격리 실패로 활자매체로 된 데이터베이스의 광범위한 오염이 이루어짐. 대상은 인쇄나 필기가 가능한 종이로 된 것에만 전이되는 것으로 보이며, 전자매체를 통한 데이터베이스 오염은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 피해 상황은 연구동의 보안문제로 인한 봉쇄가 쉽게 풀리지 않은 것과, 상부와의 연락이 불가 했던 것, 사태 파악이 지연되어 침투가 늦게 이루어 진 것 등의 이유로 연구동 내에서 계속 확산 되었음. 전이는 예상 시작시간으로 부터 [데이터 말소]가 지난 후에나 진압 되었으며, 시간안에 기억소거조치를 받아야 하는 SCP의 특성상 그 과정도 번거롭고 까다로웠음.

사후조치 : 연구동 내 연구원들을 모두 소환하여 오염된 데이터를 복구 시킨뒤, 본래는 책임을 물어 강등조치 하고자 하였으나 기억소거후 ██기지 및 타 기지내에 재배치함. 앞으로 기지와 상부 비상연락책을 상시구비하고 보안강화조치가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