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에세이

오늘은 2월 23일… 경연에 제가 걸었던 상품을 "만들러" 가는 날입니다. 며칠 전에 교수님께 연구 안 하냐고 야단을 맞았지만, 야단은 야단이고 상품은 상품이니까(?) 오늘 하루를 바쳐서 상품을 제작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오늘 하루 나인티의 고향 여행기입니다.

오늘 저의 경로는 집으로 왔다갔다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다음과 같습니다. 다섯 개 써놨지만 뒤 네 개는 사실상 한곳에 있습니다.

충렬사 - 영도대교 - 광복로 - 국제시장 - 보수동 책방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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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입니다. 절 아니고 사당[忠烈祠]입니다. 안락동에 있습니다. 4호선 충렬사역 옆에 있는데, 충렬사역에서 한 번 내린 적은 있었는데 충렬사는 저도 처음 갔습니다.

충렬사는 서원(안락서원)과 함께하는 곳입니다. 안락서원은 흥선대원군이 봐준 47개 서원 중에 하나였습니다. 서원에 배향되신 분은 부산을 지킨 영웅들입니다. 박정희 정권 때 민족영웅화 기류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있지만, 뭐 충렬사(송공단) 자체는 1605년부터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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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 출마자/당선자들이 현충원 참배를 곧잘 첫 일정으로 삼듯이, 부산에서는 충렬사 참배를 곧잘 첫 일정으로 삼습니다. 제가 준비한 상품은 부산을 멋지게 꾸며주신 두 분 (도베르만님, 플럭스만님) 의 작품을 여기 배향되신 분께 소개하는 거였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세 위패는 각각 다음 세 분입니다.

  • "전사이 가도난"이라는 명언을 남기신,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하신 동래 부사 증좌찬성 충렬공 송상현
  • 임진왜란의 맨 처음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순국하신 부산진 첨사 증좌천성 충장공 정발
  • 다대포진성 전투에서 순국하신 다대 첨사 증병조참판 윤흥신

세 분을 비롯해서 봉안되신 모든 분께 인사를 올리고, 이번 경연에 대해서 설명드린 다음 934-KO를 직접 읽어드리고 사진을 보여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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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 아래입니다. 점바치골목이 있던 자리가 바로 왼쪽입니다. 934-KO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이 자리에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사진 왼쪽에는 언제 없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목조건물이 있습니다. 이게 마지막 점집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네요. 다리 이편에는 유라리 광장, 저편에는 점바치 기록관이 있습니다. 모두 여기 점바치 골목이 있었다고만 말하지, 뭐 기념하려는 노력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점바치 할매는 영도로 옮겨가 살고 계십니다. 설날 연휴 끝나고 기어코 할매의 점집을 찾아갔습니다. 점도 보구요. 점집이 어딘지, 점 내용이 어땠는지 말씀은 안 드리겠지만, 할매는 지금 구순이 다 된 걸로 아는데 굉장히 정정하십니다. 세월을 많이 받으셨는데도 말하는 게 되게 또렷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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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명동, 부마항쟁의 현장, 광복로에 있었던 할리스커피 건물입니다. 수료 후 부산에서 머물던 시절에, 이 집으로 노트북 들고 찾아가서 번역을 하곤 했습니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로 여기가 영업을 종료했던 것 같은데, 의자도 테이블도 다 옛날 그대로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요즘은 옛날 남포문고 자리의 투썸에 가끔 찾아가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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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파크입니다. 부산 대표 빵집 B&C 분점, 보수동 책방골목 분점이 있습니다. 엽기떡볶이도 있었는데, 제가 엽떡을 제일 처음 먹은 데가 여기였습니다. 그리고 게임랜드 (양궁장, 사격장, 야구장, etc) 가 있습니다. 이 게임랜드에 동생이랑 같이 찾아갔을 때 SCP-3171을 처음 읽었습니다. 한번 여행 가서 SCP를 읽어보세요. 추억이 오랫동안 저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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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로를 서쪽으로 쭉 걷다 보면 국제시장이 나옵니다. 국제시장 앞에는 간판 없는 김치찌개집이 있습니다. 백종원 TV 프로에도 나갔지만, 그런 것 따위 전혀 홍보하지 않습니다. 4인상밖에 없지만 혼자 왔다고 상을 혼자 쓰지 않습니다. 합석이 되면 합석을 시킵니다. 메뉴는 몇 개 있긴 한데 혼자 왔으면 그냥 김치찌개를 줍니다. 수료 후 부산에 있을 때는 이 집 일주일에 2번씩 찾아갔습니다. 아직 저는 여기보다 맛있는 김치찌개집을 못 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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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끝에 책방골목이 있습니다. 여기는 제가 아는 쪽 입구인데, 이 철거 공사 중인 자리에도 옛날에 서점이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진짜 한숨 나올 정도네요. 그땐 낡았지만 활발했는데 이제는 낡은데다 추레해져서 안타깝습니다. 고서점 가보고 싶었는데 셔터 내렸더라고요. 영업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보수동 출신 책은, 단권짜리도 있긴 하지만 세계문학전집/과학만화시리즈(why 아님)/세계사만화시리즈 가 대표작이었습니다. 세계문학전집은 지금은 다른 동생 줬는데, 70권짜리 전집이었는데 13권이 없었습니다. 그땐 왜 없었는지 진짜 되게 고민했는데, 13이라고 빠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만화/세계사만화는 나무위키도 없던 옛날옛날 시절, 제2종 악마가 들려주는 지식에 목마르던 나인티의 말초적 욕망을 아주 잘 채워줬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패러다임 전환된 지식들을 만져보다 보면 세월이 흐른 게 체감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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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딱지가 붙었는데 진열된 책도 있습니다. 빌린 걸 냅다 판 것 같진 않고 도서관이 문을 닫아서 들어온 것 같은데, 이게 이 책의 제자리였던 걸까요? 정말 어떤 책은 도서관의 가호를 받지도 못하고 팔리지 못한 채로 남아있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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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서점 후보가 될 만한 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헌책방을 보면 진열 순서가 되게 난잡해 보여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기는 한데, 이 집은 체계가 진짜 한눈에 보여서 도서관에 왔는지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주제만 안 썼다뿐이지 주제별로 모인 게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일정 부분 전산화도 되어 있고, 또 뒤에 되게 어두침침한 책 창고가 멀리 보이는 걸 봐서는 이 집을 후보로 삼을 만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책을 세 권 샀습니다. 《철수 사용설명서》는 옛날에 반강제로 다녔던 학원에 책꽂이에 꽂혀 있길래 읽은 소설인데, 요즘 인생이 이 철수 같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하곤 했거든요. 원래 소설은 잘 안 사는데, 인연이 다시 돌아온 김에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괴델, 에셔, 바흐》는 옛날에 학교 도서관에서 봤던 기억이 나서 저 위에 있는 걸 보이자마자 사장님을 불렀습니다. 사실 부르자마자 또 후회했는데, 이게 구판이라서 번역 질이 안 좋댔거든요. 근데 신판은 호프스태터의 유머 해설이 없어서… 원어본을 사든지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