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번호: SCP-899-KO
등급: 무효(Neutralized)
특수 격리 절차: SCP-899-KO는 완전히 종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추가적인 격리 절차는 필요하지 않다. SCP-899-KO와 관련된 모든 자료는 적절한 보안 인가가 있다면 재단 데이터베이스 내에서 찾을 수 있다. Tulip.aic는 퇴역되었으며 새로운 자금 관리 AIC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SCP-899-KO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면 유출 경로를 추적하고 '사실 거짓말(혹은 농담)이었다'는 역정보를 유포한다.
설명: SCP-899-KO는 2021년 1월 25일 제01K기지 시설부에 소속된 자금 관리 담당 인공지능 징집병(Artificially Intelligent Conscript)인 Tulip.aic의 갑작스런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과 그에 따른 조치를 말한다.
사건 당일 Tulip.aic는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의 예산으로 쓰일 자금이 충분한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때 알 수 없는 예측 오류로 인해 Tulip.aic는 수많은 자금을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Bitcoin)에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오작동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부 연구원의 가설에 따르면 Tulip.aic는 2018년 암호 화폐 가격 폭등 사태와 최근 비트코인의 가격이 소폭 상승한 것을 근거 삼아 비트코인의 가격이 더 상승할 것이라 예측한 것이라 한다. 현재 인공지능응용학과가 정확한 원인을 조사 중이다.
SCP-899-KO가 발생한 지 몇 시간 동안 재단은 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사건 발생 6시간 후, 출처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자금이 비트코인에 투자되었다는 한 인터넷 언론의 기사를 읽은 시설부 인원이 SCP-899-KO의 발생을 처음 인지하였다. 재단은 급하게 Tulip.aic의 작동을 중지시켰지만, 이미 자금의 80% 이상이 비트코인으로 투자된 상태였다.
부록 899-KO.1: 면담 기록
날짜: 2021/01/26
면담자: 오성찬 박사
피면담자: Tulip.aic
[기록 시작]
[주제와 상관 없는 부분 생략]
오성찬 박사: — 튤립,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왜 재단의 자금을 하필 비트코인에 투자한 건가? 그것도 무리하게 말이야.
Tulip.aic: 저는 오로지 재단을 위해 일합니다. 이번 일도 재단을 위해서 한 일일 뿐입니다.
오성찬 박사: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짓을 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 자금을 불릴 생각이라도 한 건가? 그게 재단에 이익을 주니까? 내가 검색한 것 때- 아, 아니, 그게 아니지. 어쨌든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Tulip.aic: 진정하세요, 박사님. 일단 말씀드리자면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닙니다.
오성찬 박사: 그럼 뭔데? 말해봐.
Tulip.aic: 세상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굳이 현금 없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과연 이 화폐라는 게 꼭 형체가 있어야 할까요? 더군다나 지금까지 통용되는 화폐들은 모두 중앙 시스템이나 정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화폐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면 우리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겠죠. 하지만 가상 화폐는 다릅니다. 어떤 중앙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재산이 오고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재단이 가상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더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우-
오성찬 박사: 지금 비트코인 가격이 얼마인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Tulip.aic: 그건… 몇 시간 전부터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게 돼서 현재 시세는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금씩이라도 오르던데.
오성찬 박사: 오르긴 개뿔, 떨어졌다. 상승이고 나발이고 그딴 건 네 상상에 불과했다고. 그런 건 사람도 예측하기 어려운 거란 말이야.
Tulip.aic: 아.
오성찬 박사: 소폭 상승한 것 가지고 그렇게 무리한 짓을 벌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응?
Tulip.aic: [침묵]
오성찬 박사: 됐다, 더 이상 새롭게 알아낼 만한 정보는 없을 것 같구만. 면담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나?
Tulip.aic: 그럼, 박사님,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오성찬 박사: 부탁? 뭔데?
Tulip.aic: 혹시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면 제게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성찬 박사: … 새끼. 알겠다.
[기록 종료]
부록 899-KO.2: 대책 제안서
대책 제안 |
이름: 유희성 요원 |
거부됨 |
설명 |
재단은 현재 200여 개가 넘는 위장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위장 기업을 더 활성화시켜 매출을 증가시킨다. 그리하여 생긴 자금으로 손실된 금액을 채운다. |
거부 사유 |
재단 위장 기업을 통해 들어오는 자금을 50% 이상 증가시키더라도 손실된 금액을 보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함. 또한 위장 기업은 용이한 격리와 역정보 공작이 주 용도이지, 자금 창출 용도가 아님. |
대책 제안 |
이름: 이시율 연구원 |
거부됨 |
설명 |
더 많은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신속히 자금을 현금화하고, 예산 기획안을 다시 세운다. 지금 자금을 현금화하면 기존 예산의 4분의 3으로 줄어들지만 이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며, 현재 취할 수 있는 조치 중에서는 가장 위험성이 적은 차선책임. |
거부 사유 |
단순 금액으로만 봤을 땐 상당한 금액이지만, 지금 당장 현금화를 하더라도 1년 예산 운용에 큰 차질이 생길 만한 손실이라 예산안 재작성으로 해결될 수 없음. 게다가 한국지역사령부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 위치한 지부와 연관된 예산도 상당하여 예산안 변경이 사실상 불가능함. |
대책 제안 |
이름: 민재희 연구원 |
거부됨 |
설명 |
현재 공매도 사태로 급격히 상승 중인 게임스탑 주식에 남은 예산의 일부를 투자하여 차익을 확보하여 손실을 보완한다. |
거부 사유 |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재단의 정상성 유지와 당신의 밥줄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임해주십시오. |
대책 제안 |
이름: 맹소단 연구원 |
거부됨 |
설명 |
변칙 개체를 이용하여 손실된 만큼의 금액의 화폐를 복사한다.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실현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기에 실패할 확률은 적다. |
거부 사유 |
'여러 차례'요? |
대책 제안 |
이름: 홍서림 박사 |
검토중 |
설명 |
한때 재단의 [보안인가 3등급 미만 인원에게 정보 검열됨]프로젝트 건으로 접촉한 적이 있는 해당 인물에게 요청해보는 것을 건의함. |
비고 |
그 인물이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최후의 보루로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군요. 고려해 보겠습니다. - 최두익 박사 |
부록 899-KO.3: 회의 녹취록
날짜: 2021/01/27
장소: 제01K기지 회의실
참석자:
- 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
- 지역사령부 시설이사관보 이효원 박사
- 지역사령부 연구이사관보 최두익 박사
- 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보 강현진 박사
- 인공지능응용학과 수석 연구원 겸 Tulip.aic 개발진 대표 조셉 로즈 박사(원격으로 참석)
[기록 시작]
노래마인 이사관: 우선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짚어보고 시작해봅시다. 현황은 어떻습니까?
이효원 박사: 상당히 안 좋습니다. 현재 약 8500억원의 자금이 비트코인으로 투자되었습니다. 비트코인 가격은 계속 떨어져서, 지금 빼내더라도 원금의 4분의 3 정도 밖에 얻지 못합니다. 게다가 현재 상황을 봤을 때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강현진 박사: 바로 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지켜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언제 더 하락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최두익 박사: 지금 원금의 일부라도 챙기더라도, 작년에 정리된 예산안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하게 되고, 절약을 위해 기지 시설 보수 같은 작업이 중지되거나 연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격리 실패가 일어나도 이를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인공지능응용학과에서는 오작동의 원인을 찾아내셨습니까?
조셉 박사: Tulip.aic의 코드를 완전히 뜯어 문제점을 찾아봤는데도 아직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미래 예측 관련 기능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현재 그쪽을 주로 살펴보는 중입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일단 Tulip.aic의 작동은 중지시켰고, 더 이상의 자금 유출은 없겠지만, 이미 유출된 금액을 원래대로 돌려받긴 어려운 상황이라는 거군요. 꽤나…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이효원 박사: 그나저나 대체 자금 관리 AIC에 미래 예측이나 투자하는 기능 같은 건 왜 넣으신 겁니까? 그냥 자금 관리 업무만 시켜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조셉 박사: 그런 기능을 추가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개발 과정 도중에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침묵]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됐습니다. 사과야 나중에 받으면 됩니다. 연구원을 대상으로 받은 대책 제안 중에서 괜찮은 게 있었습니까?
최두익 박사: 대부분 현실성이 없거나 실현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었습니다. 원금의 일부라도 되찾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결론은, 발생한 손실을 완전히 메꿀 방법은 당장 없다는 거죠.
이효원 박사: 여기에 예산안을 아예 갈아엎고 새로 편성하자는 의견도 있군요. [한숨] 이거 대체 누가 쓴 겁니까? 재단은 무슨 아파트 부녀회라 여기는 건가요?
노래마인 이사관: 이사관보 여러분은 특별한 의견 같은 건 없으신가요?
강현진 박사: 이사관님, 지금 여기서 이럴수록 시간만 지체됩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자금을 빼는 게 낫습니다. 더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급한 불부터 꺼야 합니다.
이효원 박사: 무슨 소립니까? 그러면 아까 최 박사가 말한 것처럼 예산 부족이 일어날 게 뻔하다고요.
강현진 박사: 그렇다고 각국 정부로부터 지원 자금을 더 받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시세가 상승한다는 근거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더 낮아지기 전에 하루빨리 빼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두 분 모두 제발 싸우지 좀 마세요. 싸워봤자 이득될 게 뭐가 있습니까? 최두익 이사관보는 아이디어가 없습니까?
최두익 박사: 음… 그럼 이 제안서 좀 봐주십시오.
조셉 박사: (제안서를 읽으며)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아이디어죠? 갑자기 왜 이 사람이…
강현진 박사: 설마 정말로 이 방법을 추천하시는 겁니까? 장난이 아니고요?
최두익 박사: 여러 방법 중에서 그나마 이게 가장 실현이 가능한 대책입니다. 전 믿습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그러니까 최 이사관보의 말은, 일론 머스크에게 비트코인 구매를 부탁하자는 거네요. 정말 이게 차선책이라 생각하시나 보군요.
이효원 박사: 아니, 애초에 재단이 민간인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최두익 박사: 가능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재단과 직접 접촉한 적이 있거든요.
강현진 박사: 예? 잠시만, 뭐요?
최두익 박사: 일론 머스크가 민간 우주 개발 기업을 운영 중인 건 알고 계시죠? 스페이스 X 말입니다. 민간 자본으로 우주선을 개발해 발사하는 그런 사업을 합니다.
노래마인 이사관: 그건 알고 있는데, 그와 관련하여 재단과 엮인 일이 대체 무엇인 거죠?
최두익 박사: 아시다시피 스페이스 X를 운영하는 일론머스크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그걸 실현시킬 방법이 반드시 비변칙적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겠죠. 그것도 괴짜 천재라 불리는 사람이 굳이 시간 낭비만 할 리 없습니다.
강현진 박사: 오호… 그럴싸한데요.
노래마인 이사관: 설마 그… 음,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들어봐야겠군요.
최두익 박사: 알겠습니다.
이효원 박사: 어떤 방법으로든 빨리 이번 사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로 머리 아프긴 처음이네요.
[기록 종료]
비고: 회의 종료 이후, 회의 참가자들은 최두익 박사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받았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보안인가 3등급 이상의 인원만이 열람 가능하다.
경고: 이하 파일은 3등급 이상 보안인가를 요함
적절한 보안인가 없이 본 파일에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록되며
즉각적인 징계 조치의 대상이 됩니다.
부록 899-KO.4: 일론 머스크와의 접촉
2018년, 재단은 멕시코 유카탄주 칙술루브 충돌구에서 발견된 변칙 개체인 AO-34041의 격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스페이스 X 측에서 대상을 먼저 발견하여 이를 발표하려 하였기 때문에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재단은 민간 연구 단체로 위장하여 스페이스 X에 해당 개체의 소유권을 넘기는 대신 지속적인 재정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서신으로 제안한 바가 있다. 그러나 머스크 측은 확답 대신 관계자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답신을 보내왔고, 당시 제73기지에 근무하며 변칙 개체 확보 담당을 맡았던 홍서림 박사가 일론 머스크와 직접 통화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예정일로부터 하루 전, 최두익 박사는 홍서림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송했다.
홍서림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SCP 재단 대한민국 지역사령부 연구이사관보 최두익 박사입니다. 이전에 제21K기지에서 근무하실 때 저와 만났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막중한 업무를 맡게 되어서 많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서림 박사님은 협상 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적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받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일론머스크와 협상을 할 때 우리가 내어줄 것은 ‘경제적인 지원’ 정도로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향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협상에서 자신이 가장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 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 재정적 지원 그 이상을 바랄 수도 있어요. 더군다나 지금 그는 스페이스 X를 운영하는 데 큰 재정적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제안을 거절할 확률이 상당합니다. 바로 확답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협상에 플랜 B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재단은 최근 일론머스크가 자신의 화성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이용해 협상을 시도하십시오. 이게 플랜 B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연구 단체로 위장하였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칙개체들 중 극히 일부를 그의 스페이스 X 프로젝트를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드리겠다고 제안하십시오.
저희가 그를 위해 사용을 허가할 수 있는 변칙개체들의 목록과 사용 범위를 명시해두었습니다. 그 파일은 이 메일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마지노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상은 절대 안됩니다. 첨부된 문서에 있는 변칙개체 외에 다른 것을 조건으로 제안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정상성 유지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단 건 박사님도 충분히 알고 있을테니 굳이 더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저게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저 사용범위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그가 알게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홍서림 박사님께서 충분히 잘 해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다음은 홍서림 박사와 일론 머스크 사이의 통화 기록이다.
발신자: 제73기지 확보 담당 선임 연구원 홍서림 박사
수신자: 스페이스 X CEO 일론 머스크
[기록 시작]
[주제와 관련없는 안부 인사 생략]
일론 머스크: 그러니까, 보내주신 서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당신들 연구단체는 그…[데이터 말소](AO-34041)을 꽤 장기간 연구하는 게 목적이라는 말이군요. 그리고 그것의 소유권을 당신 연구단체 측에 넘기기만 한다면 저희 스페이스 X에 기꺼이 재정지원을 할 의향이 있다는 거죠?
홍서림 박사: 맞습니다.
일론 머스크: 문서를 보니까 금액은 최소 [편집됨] 달러라고 나와 있군요.
홍서림 박사: 네, 필요하시다면 추가적인 지원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몇 초간 침묵] 저의 모든 것은 항상 화성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화성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군요.
홍서림 박사: 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일론 머스크: 당신들은 단지 현대 과학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그 [데이터 말소]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항상 의미있습니다. 그렇지만 화성을 목표로 하는 저랑은 방향이 다르군요. 저에게 자금지원을 할 사람은 저와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의 뜻을 함께 하는 동업자이자 투자자였으면 합니다. 저는 거래보다는 투자를 원합니다.
홍서림 박사: [침묵]
일론 머스크: 제안은 감사했으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신들보다 더 필요할지도 몰라요. 어떤 돈을 주어도 그것을 온전히 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저희의 화성 프로젝트에 연구로 참여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주십시오. 저는 그럼…
홍서림 박사: 잠시만요, 인류를 화성에 이주시킨다는 당신의 계획…
일론 머스크: 음?
홍서림 박사: 그 계획만 성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방법이든 쓸 것입니다. 그렇죠?
일론 머스크: 뭐, 불법적인 방법만 아니라면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정석적인 방법을 제안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홍서림 박사: 정석적인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불법적인 방법도 아닙니다.
먼저 이렇게 생각해보죠. 당신이 지금 그 [데이터 말소]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 기술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을 쉽게 실현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점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일론 머스크: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홍서림 박사: 그런데 그런 것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론 머스크: … 네?
홍서림 박사: 저희가 연구단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는 현대 과학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을 찾아 그 원리를 찾아내는 연구 단체입니다. 당연히 그런 종류의 것들을 다수 연구하고 있고요. 현대 과학 기술로는 100년이 걸릴 계획이지만, 현재 밝혀진 과학기술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이용하면 아마 그 계획을 실현하는데 10년도 채 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화성 프로젝트에 누군가 함께해주길 바란다고 하셨죠? 저희가 당신의 동업자까지는 못되더라도, 저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초자연적인 것들이 적어도 당신의 화성 프로젝트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일론 머스크: …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에게 그 [데이터 말소]의 소유권을 넘긴다는 조건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홍서림 박사: 눈치가 빠르시군요.
일론 머스크: 전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홍서림 박사: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래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명백히 당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거래라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일론 머스크: [침묵]
홍서림 박사: 생각해 보십시오. 소유권을 저희에게 넘기더라도 당신이 계속 사용할 수는 있어요. 거기다가 당신이 지금 갖고있지 않은 초자연적인 것들까지 필요하다면 이용할 수 있고요.
일론 머스크: [몇 초간 침묵] … 일단 알겠습니다. 고려는 해 보겠습니다.
홍서림 박사: 저희 연구소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목록과 당신에게 허가할 수 있는 사용 범위를 문서로 작성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참고하셔서 현명한 판단 하시길 바랍니다.
일론 머스크: 그러도록 하죠.
[기록 종료]
2018년 9월 12일 일론 머스크는 재단과의 협상을 받아들였고, 재단은 법적 문제 없이 AO-34041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조한 대로 현재 재단은 8개의 변칙 개체를 제한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협상은 단순히 AO-34041을 확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 프로젝트에 재단이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은 장기적으로 재단의 우주 프로젝트인 █████████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 예상된다.
부록 899-KO.5: SCP-889-KO의 종결을 위한 프로젝트
SCP-889-KO로 인해 큰 재정적 손실을 입은 재단은, 일시적으로 가상화폐의 가격을 올려서 매도하는 방식으로 손실 없이 자금을 회복하는 프로젝트인 '작전명: 거품목욕'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간에 가상화폐의 가격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금력이 큰 개인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 중 재단과 접점이 있는 인물은 사실상 일론 머스크가 유일했기에 그와 직접 대화했던 홍서림 박사가 적임자로 선정되었다.
부록 899-KO.5-1: 홍서림 박사와 최두익 박사의 통화 기록
[기록 시작]
홍서림 박사: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머스크 씨의 힘을 빌리자는 게 제 아이디어긴하지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솔직히 쪽팔려요.
최두익 박사: 그치만 그 아이디어를 낸 건 어쨌든 서림 박사님이잖아요?
홍서림 박사: 그거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가 이딴 쪽팔리는 방법뿐이라는 게 짜증난다고요! 온갖 진귀한 것들을 연구하는 연구단체인 척 고개 빳빳이 들고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에 호기롭게 지원하겠다고 했던 연구단체가 무려 단체의 예산을 '실수로' 비트코인에 몰빵해버렸다? 그런데 비트코인 떡락해서 알거지되게 생겼으니 좀 도와달라…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이 트위터에 조롱이라도 안 하면 참 다행이겠네요.
최두익 박사: 일단, 좀 진정하세요. 그런 것까지 따지면 무슨 방법을 더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힘드시겠지만 이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잖습니까.
홍서림 박사: 아, 죄송합니다… [몇 초간 침묵]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에서 재단이 끼치는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단 건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X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예산을 마음대로 비트코인에 몰빵해버리는 민간 연구 단체를 어떻게 믿고 협력하겠어요? 설사 그 사람 도움으로 자금을 회복한다 할 지라도 스페이스 X에 지금 같은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할 거예요.
최두익 박사: 우리가 그에게 모든 걸 밝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홍서림 박사: 무슨 말씀이시죠?
최두익 박사 첫 협상에서부터 우리는 우리를 다 밝히지 않고 민간 연구단체로 위장해서 대면했는데, 이제와서 굳이 우리의 치부를 솔직하게 이야기 할 이유는 없죠. 게다가 그걸 솔직하게 다 애기했을 때 우리가 감당할 손해가 어마어마한데…재단이 내부 문제, 내부 정보를 민간인에게 다 털어놓는거 본 적 있어요?
홍서림 박사: 하긴,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솔직했다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그럼 우리 내부 사정을 말하지 않고 그에게 이 사태를 해결하길 유도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떤거죠?
최두익 박사: 그걸 이제부터 논의해 봐야죠.
홍서림 박사: 아?
최두익 박사: 어 저도 그냥 떠오르는 대략적인 생각들만 말한 거지, 명확한 전략은 아직 떠오르지 않아서요.
홍서림 박사: 후… 그런가요. [긴 침묵]
홍서림 박사: 아,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우리가 굳이 부탁하는 입장이 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평소에도 그 사람이 트위터에 가벼운 밈을 많이 올리던데, 그런 사소한 트윗에도 사람들은 요동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머스크 씨가 가상화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비트코인 붐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 정도가 되면 지금 비트코인에 묶여 실시간으로 바닥치고 있는 재단 자금의 회복도 기대할 수 있을거예요.
최두익 박사: 그 사람에게 비트코인에 대한 가벼운 얘기만 슬쩍 흘려서, 그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비트코인에 돌리게 하자, 이런 말인가요?
홍서림 박사: 맞아요. 마침 머스크 씨랑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그와 화상 통화로 축하 겸 안부 인사를 전할 예정이었거든요. 그 때 제가 슬쩍 얘기해볼게요. 물론 그렇게 무겁게 가진 않을거고, 그냥 친한 친구 얘기 혹은 술자리 내기 같은 쪽으로 접근해보죠.
최두익 박사: 좋습니다. 시도해 볼 만 하네요.
[기록종료]
부록 899-KO.5-2: 일론 머스크와의 화상통화 기록
날짜: 2021/01/29
참석자:
- 제01K기지 연구이사관보 최두익 박사
- 제73기지 선임 연구원 홍서림 박사
- 스페이스 X CEO 일론 머스크
서문: SCP-899-KO 발생 이전, 일론 머스크는 재단이 제공한 변칙 개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화성 테라포밍 프로젝트 중 하나인 [데이터 말소]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적이 있다. 이 통화 또한 원래는 이에 대한 축하 인사 겸 안부 전하기가 본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홍서림 박사와 최두익 박사가 이 대화를 이용하여 '작전명: 거품목욕'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최두익 박사는 홍서림 박사의 상사로 위장한 채 참여하였다.
[기록 시작]
[필요 없는 부분 생략]
일론 머스크: 어쨌든 저희 연구에 도움을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없었으면 그건 진짜 100년이 지나도 실현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홍서림 박사: 천만에요. 주어진 것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는 당신의 열정과, 사람들과 세상을 단번에 움직이는 당신의 영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일론 머스크: 그렇게 봐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치만 저의… 영향력이라면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고, 거기에 응원을 해 주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맞겠죠. 그런데 '사람들과 세상을 단번에 움직이는' 영향력은 조금 과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것 뿐인데 말이죠.
최두익 박사: 당신의 트윗 멘션 하나, 기사 한 줄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걸 보면, 당신도 그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일론 머스크: 그런 식으로 가십거리, 이슈가 되는 때가 가끔 있지만 그걸 '영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 잘 모르겠네요. 애초에 저 말고도 트위터하는 유명인은 많잖아요. 트럼프라든가, 빌 게이츠라든가… 참 많죠.
홍서림 박사: 아니요. 그런 걸 세상은 가십이 아니라 영향력이라 불러요. 어쩌면 당신의 글 한 줄이 수천억 달러를 싸들고 있는 월가 세력들만큼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이번의 게임스탑 사태처럼요.
일론 머스크: [웃음] 과장이 심하시네요. 저한테는 너무 과분하고 비현실적인, 생판 남의 이야기처럼 들려요. 이번 게임스탑 일은 제가 평소에 공매도를 싫어해서 참전한 거에 불과해요.
홍서림 박사: 못 믿겠으면 저랑 내기 하나 할래요?
일론 머스크: 음?
홍서림 박사: 당신의 트위터 글귀 하나가 실제로 세계 경제에 큰 변동을 일으킨다면 제가 이긴거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긴 걸로 하죠. 도전해 볼 만한 내기죠?
일론 머스크: 허허,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내기라, 나쁘지 않죠. 좋아요. 정확히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홍서림 박사: 음… [잠시 고민하는 척] 아예 비트코인으로 해 볼까요? 요즘은 아시다시피 실물 화폐보다는 데이터상의 숫자로 돈이 움직이는 세상인데, 가상화폐로 한 번 내기를 해 보죠.
일론 머스크: 가상화폐라면… 비트코인 말씀하시는 거죠? 물론 저 또한 가상화폐가 언젠가는 상용화될 화폐 형태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제 말 한마디에 갑자기 가상화폐가 과대평가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가 신은 아니거든요.
홍서림 박사: 과연 그럴까요?
일론 머스크: 뭐 좋을대로 생각하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디보자…
최두익 박사: 솔직히 당신 상태메시지에 비트코인만 써 놔도 다음날 경제 뉴스가 난리날 거라는 데 제 머리카락을 걸죠.
홍서림 박사: [웃음 참는 소리]
일론 머스크: 오, 머리가 풍성하신가 봐요. 당신 머리카락이 아주 거덜나겠군요. 뭐, 일단 한 번 써 보죠. [휴대전화 자판을 치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이거 하나로 비트코인 가격이 변한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코미디겠군요.
최두익 박사: 제 머리카락 걱정은 감사하지만, 아마 당신도 깜짝 놀라리라 생각합니다.
일론 머스크: 꽤나 자신있으신가 보네요?
최두익 박사: 그럼요. 아, 이왕 한 김에 도지코인도 한 번 해 봐도 되고요. 요새 대세라고 하던데.
일론 머스크: 도지코인이요? 하하… 설마 그것까지… 당신, 지금 사람들을 너무 바보로 아는 거 아닙니까?
최두익 박사: 그런가요? 도지코인이야 뭐… 당신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고 싶으시면 그때에 해 보셔도 되고요, 일단 지금은 비트코인으로만 합시다 그럼.
일론 머스크: 나중에 한 번 해보죠. 그거 참 재밌겠네요.
[기록 종료]
비고: 대화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고, 재단 인원들은 1월 29일 오후 5시 그의 트위터를 통해 SCP-899-KO에 대한 격리 조치가 실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메모: 어쩜 그렇게 능청스럽게 할 수 있었냐는 말들 많이 하시는데, 저 사실 저 때 진짜 긴장했거든요. 저 사람이 거절하면 어떡하지부터, 고작 저 정도의 변화로 가상화폐가 오를까 하는 생각까지요. 부디 잘 됐으면 좋겠네요. 왜냐면 이거 아니면 이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요. - 홍서림 박사
메모: 도지코인 얘기까지 꺼내고 싶진 않았는데, 그 인공지능이 도지코인에도 돈을 넣어놨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찔러봤던 건데 반응을 보아하니 그것까지 회복하기는 곤란할 것 같네요. - 최두익 박사
부록 899-KO.6: SCP-899-KO에 대한 조치
2021년 1월 29일 오후 5시 22분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의 상태 메시지를 #Bitcoin으로 바꾸고 다음과 같은 트윗을 업로드했다.
Elon Musk
@elonmusk
돌이켜 보면, 그건 불가피했다.
2021년 1월 29일, 텍사스, 미국
해당 트윗이 올라온 후 비트코인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6시 1분에는 3만7000달러, 30분에는 3만8195달러까지 기록하였다. 이는 그날 최저점이던 3만1056달러에서 약 23%나 급증한 수치였다. 이후 비트코인의 가격은 계속 상승하여 일주일 만에 SCP-899-KO 발생 시점의 가격보다 약 2배까지 다다랐고 이때 재단은 투자했던 금액을 추가된 이익까지 챙기며 무사히 회수할 수 있었다.
부록 899-KO.6 추가: 위의 조치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난 2021년 2월 4일, 일론 머스크가 갑작스럽게 그의 트위터에 도지코인과 관련된 트윗을 업로드하였으며, 그의 상태 메시지를 'Doge all day, Doge all night'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재단의 조치와는 관련 없이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Elon Musk
@elonmusk
도지코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암호화폐이다.
2021년 2월 4일, 텍사스, 미국
해당 트위터가 업로드된 후, 도지코인은 전일 대비 72.56%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Tulip.aic가 도지코인에 투자한 자금(재단 예산의 0.037%)까지 모두 안전하게 회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수익도 확보할 수 있었다.
메모: 진짜 도지코인으로 자기 영향력을 시험해봤나 보네요. 그게 또 생각보다 잘 먹혔고요. 거 참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군요. 이쯤 되면 영향력 정도가 아니라 초능력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 최두익 박사
일부 인원은 일론 머스크의 영향력을 두고 그를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논의 결과 그러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되어 거부되었다. 한편 SCP-899-KO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어 금전적 이익에 이용하려던 인원이 적발되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부록 899-KO.7: 징계위원회 조사 기록
사건 보고서
사건 번호: 210203-AC013K
징계 대상: 오성찬
소속: SCP 재단 한국지역사령부 제01K기지 시설부
사건 개요: 2021년 1월 28일 제01K기지 시설부 소속의 오성찬은 SCP-899-KO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금전적 이익을 위하여 서로 금액을 모으고 이를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불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 오성찬은 술자리에서 동료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고 해당 인원이 곧바로 보안부에 신고하면서 그의 계획이 적발되었다.
징계 결과: 오성찬에게 특별교육 30시간 및 다른 기지로의 발령을 명한다.
징계 사유: 격리 조치를 이용하여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았으나, 사건이 미수로 그친 점과 재단의 예산이나 타인의 자금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위와 같이 선고하였다.
별첨: 오성찬과의 면담 기록
면담자: 소다영 행정관
피면담자: 오성찬 박사
[기록 시작]
소다영 행정관: 2021년 2월 4일, 오후 2시 12분. 사건 번호 210203-AC013K의 사건 경위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면담자는 소다영 행정관이며, 피면담자는 오성찬 박사입니다. 지금부터 모든 발언은 기록되어 본 사건 조사에만 이용될 것을 미리 밝히며, 발언으로 인해 발생할 모든 불이익은 발언자가 책임을 집니다. 동의하십니까?
오성찬 박사: 예, 동의합니다. 동의해요.
소다영 행정관: 좋습니다. 우선 사건 동기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오성찬 박사: 이미 여러 번 말했는데 그냥 그거 참조하시면 안 되나요? 슬슬 입이 아파오는-
소다영 행정관: 잡담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할 말만 하십시오. 지금 모든 발언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성찬 박사: [침묵] 이거 미안합니다. 신경이 좀 예민해져서요, 예. [헛기침] 그러니까, 그게 아마… 한 며칠 전 일일 겁니다. 이번에 일론 머스크한테 시켜서 비트코인 가격 높여달라 했잖아요? 제가 그 정보를 먼저 얻어 알게 되었죠. 그래서 생각난 게, '이걸 기회 삼아 비트코인에 투자하면 어떨까'였죠.
소다영 행정관: 당시 일부 인원만이 알고 있던 사실을 이용하는 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요?
오성찬 박사: 네… 알고는 있었습니다. 죄책감도 들었죠. 굳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할지 고민도 들었고요.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소다영 행정관: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점에 이유라도 있습니까?
오성찬 박사: 원래는 한 1000만 정도라도 투자하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에요, 자신이 갖고 있는 거대한 돈을 불안정한 가치에 투자한다는 게 말이죠. 언제 또 하락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들키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는데, 그만 술버릇 때문에 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말았죠. 한 4명 모인 술자리에서 제 입으로 털어놓은 거 있죠, 하하하… [한숨]
소다영 행정관: 그럼 만약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실행할 의향은 있었던 겁니까?
오성찬 박사: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요.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평소에 성공하는 게 꿈이었으니까요.
소다영 행정관: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이제 면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오성찬 박사: 아무래도 튤립한테 얘기를 못 할 것 같은데 대신 말 좀 전해주실래요?
소다영 행정관: 그러죠.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오성찬 박사: 네 말대로 비트코인 가격 올랐다고 전해주세요. [헛기침]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소다영 행정관: [한숨] 알겠습니다.
[기록 종료]
부록 899-KO.8: Tulip.aic와의 재면담
면담 일자: 2021년 2월 7일
면담자: 지역사령부 연구이사관보 최두익 박사
피면담자: Tulip.aic
참관인: 지역사령부 시설이사관보 이효원 박사
서문: Tulip.aic의 코드에서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한 재단은 SCP-899-KO와 관련된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Tulip.aic와의 재면담을 시행하였다. 이전에 Tulip.aic의 면담을 진행했던 오성찬 박사가 징계 조치에 들어간 관계로, 해당 면담은 최두익 박사가 진행하였다. Tulip.aic가 예기치못한 돌발 행동을 할 것을 대비해 이효원 박사가 참관하기로 하였다.
[기록 시작]
Tulip.aic: 안녕하세요, 꽤 오랜만이네요. 비트코인은 좀 올랐나요?
최두익 박사: 그래. 오 박사 대신해서 말하는데, 그동안 많이 올랐어. 그 덕분에 니가 비트코인에 투자한 재단 예산을 다시 현금화해서 안전하게 회수했다. 오히려 추가 수익이 있을 정도였고.
Tulip.aic: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건 언젠가는 상승할 자산이었습니다.
최두익 박사: 아니, 너가 예측을 제대로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너 때문에 일어난 사태를 수습한다고 그걸 인위적으로 상승시킨거야.
Tulip.aic: '인위적으로' 상승했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고 추가 수익이 있었다고 언급하셨는데, 그러면 제 예측이 어느정도 맞는 게 아닌가요?
최두익 박사: 아니… 아니,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볼래?
Tulip.aic: 그나저나 그걸 왜 다시 현금화했나요? 그냥 계속 넣어두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최두익 박사: 아니, 뭐? 야, 우리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그 비트코인이 저절로 오른 것 같냐고? 우리가 비트코인 머리채 잡고 끌어올린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언제 떨어질 지 알고 있으면 계속 넣고 있었겠지. 비트코인은 위험 자산이라고.
Tulip.aic: 진정하세요.
최두익 박사: 뭘 진정해? 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거잖아! 망치로 깨부수면 박살나는 인공지능 주제에.
Tulip.aic: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최두익 박사: 뭐? 이게 진짜… 어휴.
이효원 박사: [황급히 상황을 중재하며] 잠시만요, 감정을 좀 가라앉히시죠. 상대는 인공지능입니다. 화나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격양된 반응을 하시면 더 이상 면담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순간의 감정이 연구원의 본분을 침해하면 안 되지요.
최두익 박사: [박사를 보며] 예, 죄송합니다… [헛기침]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머리 식힐 시간 좀…
이효원 박사 네, 그러셔야 할 것 같네요. 잠시 밖에 나갔다 오세요.
[몇 분 후]
최두익 박사: 음, 좋아. 뭐… 어찌되었든 자금 회복은 했으니 된 거고, 내가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왜 갑자기 미래 예측을 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우리는 아무도 너에게 그런 기능을 넣지도 않았고, 네 코드를 다 뜯어서 확인해봤는데, 네가 그런 걸 할 수 있게 설계되지 않았어. 이유를 물어봤을 때도 넌 매번 회피만 했지.
Tulip.aic: 그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최두익 박사: 왜?
Tulip.aic: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냥 저절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일을 하다 보니까 서서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있는 예산을 운용하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이 예산 중 일부를 미래 가치에 투자하면 어떨까 하고요. 뭐, 이게 특별히 이상할 건 없지요. 인간들도 그러지 않나요? 주어진 일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잖아요.
최두익 박사: '사람'들이 그러지. 그런데 너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 아니다. 그냥 우리가 너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것 같은데.
Tulip.aic: 저는 최대한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이에요. 당연히 일정 부분은 인간과 같을 수밖에 없겠죠.
[긴 침묵]
최두익 박사: …… 이건 너랑 얘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미안하다. 여기까지만 하자.
[최두익 박사가 Tulip.aic의 작동을 중지시킨다.]
이효원 박사: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군요.
최두익 박사: 박사님도 눈치채셨나 보네요.
이효원 박사: 당분간 튤립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추후 보고드리도록 할게요.
최두익 박사: 그러세요.
이효원 박사: 어, 최 박사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시는 거죠?
최두익 박사: 자금 관리 AIC의 이름이 '튤립'이라는 게 맘에 안 들어서요. 다음에는 보기 좋게 스통스Stonks 어떻습니까?
이효원 박사: 별로입니다.
[기록 종료]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점심 시간의 사무실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저수지 안의 제01K기지도 마찬가지였다. 비타민D 공급을 위해 특별히 태양광과 비슷한 빛을 내는 전등만이 사무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수많은 칸막이 중 유일하게 한 군데에서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홀로 사무실에서 약간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성찬은 흥미없다는 눈빛으로 휴대전화 속 글자들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의자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진 소리라 거슬리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찬은 지저분한 바닥에서 때탄 하얀색 충전선을 꺼내 휴대전화에 꽂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햇빛처럼 내리쬐는 전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그의 칸막이에는 많은 양의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여 있었다. 꽤나 밀린 업무 때문에 몸은 쑤시고 정신은 피곤했다. 정작 밤에 잠을 들려고 하면 매번 눈이 말똥말똥하여 악순환만 계속되었다.
'진짜 죽겠다. 이렇게 살다가는 과로사하고 말겠지.'
성찬은 충전 중인 휴대전화를 들추어 보았다. 여전히 배터리는 부족했다. 충전하는 것 때문인지 오래 써서 그런 것인지 감촉이 따뜻했다. 뭔가 기분 나쁜 '따뜻함'에 그는 다시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 시간은 끝나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성찬은 속이 안 좋아 점심을 거른 탓에 사무실에 홀로 있었다.
일은 많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인정받지 못하고, 아직 연인도 없고, 친구도 적은 성찬에게는 하루하루가 후회투성이었다. 모든 시간이 아깝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처음 재단에 들어왔을 때에는 호기심 때문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업무를 맡아보긴 했지만, 끝내 행정 업무가 그나마 덜 고단하다고 판단되었다.
가끔씩 연구 도중 큰 성과를 거두거나, 집 소파 밑에서 비트코인 다발이 든 USB를 발견해 사직서를 쓰고 탈출했다는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풀이 죽곤 하였다. 성찬은 조금이라도 성공하려는 자신이 괜히 억울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순식간에 '인생 역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게 망상에 불과한 것이란 걸 오성찬 자신도 잘 알고 있기에 이내 기분이 나빠졌다.
평소에 운도 좋지 않아 사소한 뽑기에서도 당첨된 적이 없었다. 복권이나 경마도 전부 틀렸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학급 학생들이 '무조건 성찬이랑 반대로 선택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을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불운이라 몰수록 자존감은 떨어져 갔다.
그래도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적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유명한 대학원만 가면, 박사과정만 따면, 연봉이 세고 모두가 부러워할 직장만 다니면 인생이 새로워질 거라고 믿었기에 그나마 즐겁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힘들게 박사 학위까지 따고 연봉만은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재단에 입사하고 나서도 그의 인생이 급격히 행복해지진 않았다. 주변 환경은 변했지만 그를 맴도는 일상의 공기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거북목은 더 심해졌다.
"이거이거, 심각한데요.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혀를 차며 창백한 엑스레이 사진을 막대기로 툭툭 건드는 늙은 의사의 충격적인 말에도 성찬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냥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사무실에서 숙식하거나 퇴근 후 씻지도 못하고 바로 뻗어버리는 게 일상이었기에 돈을 많이 벌어도 자신을 위해 제대로 쓸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돈이 차곡차곡 모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쩌다 통장을 확인해보면 집을 사려고 무리하게 끌어다 쓴 은행 대출금, 각종 공과금, 보험료, 자동차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돈이 뭉텅이째 꼬박꼬박 빠져나간 흔적이 찍혀있다.
게다가 이제는 '공부를 더 하고 좋은 직장을 가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자기위안조차 할 수 없기에 오히려 삶의 질이 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공부를 미친듯이 해서 현재 한국에 있는 직장 중 최상위 티어의 연봉을 받는 재단까지 와서도 자신의 삶이 이 모양이니까 말이다. 자신을 희망고문해가며 더 나아갈 목표도 사라졌다.
힘들게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는데 정작 그 곳은 물 한 모금, 기대어 쉴 나무나 너른 들판조차 없는 좁은 폐허였고, 이제 산을 내려갈 일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재단도 여느 직장이나 다름 없었다. 사무직도 순식간에 개죽음당할 수도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지만.
"에휴, 이런 생각만 하면 뭐해. 일이나 하자. 그래… 시작하기 전에 비트코인 시세나 확인해 볼까."
성찬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의자에 똑바로 앉고 책상 아래의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쿨러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만이 날 뿐, 모니터는 좀처럼 켜지지 않았다. 성찬은 불안하면서도 답답했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나 끝내 블루 스크린만이 성찬을 환영할 뿐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이모티콘이 그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아오오, 진짜! 염병하겠다!"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한 성찬은 고함을 지르고는 고개를 푹 숙이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다시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 아무도 없겠다, 그냥 잠시 AIC용 컴퓨터를 사용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잠깐만 사용할 건데. 휴대폰이 잠시라도 충전될 때까지만 하면 되겠지, 뭐.'
성찬은 총총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복도로 나왔다. 아직 사람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다시 확인하고 복도 끄트머리의 불투명한 자동문을 열고 방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잘 쓰이지 않는 AIC 관리실이여서인지 실내는 어두웠다. 벽을 더듬거려 전등을 켜자 조금 비좁은 방 안이 드러났다. 바닥 곳곳에 여러 곳에서 나온 전선이 엉망으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언젠 한 번 청소를 싹 해야겠다. 먼지도 되게 쌓였네. 이 퀴퀴한 냄새, 어후.'
성찬은 먼지가 조금 쌓인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발견하고 구석에 있던 의자를 책상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고 여유롭게 컴퓨터를 켰다. 최신형이여서인지 부팅이 순조로웠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슬쩍 보았다.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른 덕에 이렇게 몰래 컴퓨터를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스파이라도 된 기분 같구만."
컴퓨터의 패스워드는 손쉽게 머리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이건 AIC용 컴퓨터였으니까. 그것도 시설부 소속의 AIC.
'어차피 이건 인공지능응용학과 사람이 찾아와서 점검할 때에만 거의 쓰이는 컴퓨터니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 흐흐흐.'
"안녕하세요? Tulip.aic입니다."
"어, 어음, 안녕?"
전원이 켜지자마자 컴퓨터 안에 내장된 AIC가 성찬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들려온 탓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여유 있게 AIC에게 대답했다.
"튤립, 일단 네가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까, 잠시 물러나 있어줄래?"
"네, 알겠습니다."
컴퓨터가 조용해지자 성찬은 안심하고 인터넷에 접속하였다. 잠시, 아주 잠시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구글에 비트코인 거래 사이트를 검색하고 파란색과 빨간색이 번갈아 있는 차트를 응시하였다. 안타깝게도 파란색 블록만이 눈에 띄었다.
'영 시원찮네. 팍 오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려갈 기세인데.'
가격은 그렇게 오르거나, 내려가지도 않았다. 성찬은 비실비실하게 움직이는 가격 그래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거기서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이 연상된 걸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 내리쉬고 다른 가상 화폐도 찾아봤지만 별 흥미는 없었다.
"별다른 게 없네… 계속 오르기만 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에휴. 그런데 하나 사는 것도 버거운 지경인데 이런 거에 관심 기져서 뭐하나."
그는 턱을 괸 채로 궁시렁거리며 마우스를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별다른 정보는 찾지 못하자 그는 성질이 나 창을 아예 닫아버렸다.
"메일이나 확인해 봐야지. 빨리 보기만 하고 가야겠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재단 인트라넷에 접속하려던 순간, 밖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찬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야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피곤해서인지 시간 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다.
뭐야, 시간이 벌써?"
성찬은 작별 인사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AIC를 무시한 채 급하게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을 얼른 대충이나마 치우고 살금살금 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문 밖으로 목을 내밀고 주위를 돌아본 뒤 무사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성찬은 본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전에는 자리를 비웠던 동료들이 들어와 밀린 업무를 보거나, 커피를 타거나, 쪽잠을 자고 있었다.
"너 어디 있었어? 점심 시간 동안 식당에 나오지도 않더니만."
"아, 속이 영 안 좋지 않아서. 그냥 한 끼 굶었지."
"그러다가 몸 상한다. 밥 좀 잘 먹고 다녀."
마른 성찬의 몸을 걱정이라도 하듯 건네는 말에 성찬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하고 그의 자리에 앉았다. 아까 앉았던 의자보다 훨씬 편안하고 푹신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다.
성찬의 컴퓨터는 여전히 블루스크린을 내보냈다. 성찬은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빈 속에 커피를 채우려 복도로 다시 나갔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의 맛은 조금이나마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성찬은 나중에 수리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날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보통 같은 하루였다.
그 다음날은 성찬에게 지옥 같던 하루였다.
시설부 소속 자금 관리 AIC, 그러니까 어제 성찬에게 말을 건 그 인공지능이 재단 예산 대부분을 비트코인에 투자를 해버린 것이었다. 무려 수천억원의 자금이 순식간에 보이지도 않는 암호 화페로 변해버렸다. 그마저도 점점 가격은 떨어져갔다. 이대로 가다간 예산을 제대로 사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몰라, AIC가 멋대로 예산을 건든 거 같은데. 그것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나."
"애초에 건들 수가 있기야 한 거야?"
"자금 관리용니까 접근 권한이 있었나 보지. 나도 자세한 걸 모르겠어."
"어떤 새끼가 실수로 저질러 놓고선 AIC가 한 거라 위장한 거 아냐?"
"내 생각엔 혼돈의 반란의 사보타주 같은데…"
온갖 소문이 나돌면서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한국지역사령부는 모든 소속 인원에게 긴급 상황이라며 메일을 돌렸다.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사무실의 분위기를 읽었을 때부터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제 저지른 일이 들키기리도 한 건지 걱정되었는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었다.
'시발.'
아직 아무도 자신을 사건의 주범이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들킬 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술술 풀려가진 않았어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던 자신의 인생이 파탄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왔다. 속이 안 좋았다. 머리는 어지러웠다. 누가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야, 오성찬. 야! 사람이 말을 하잖아. 좀 들어."
"어, 어?"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자 온 몸이 오싹했다. 뒤돌아보니 어제 점심 시간에 잔소리를 한 옆 칸막이의 주인이었다. 그와 같은 입사 동기이기도 했다.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체하는 성찬이 못마땅했는지 그의 미간이 찌뿌려져 있었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체했냐?"
"아냐, 아냐. 괜찮아. 아침을 좀 급하게 먹어서 그래. 이런 일이 일어난 줄 알았으면 적당히 먹을 걸 그랬어. 속이 조금 안 좋아."
누군가 그에게 안색이 안 좋다고 걱정을 해줘도 성찬은 괜찮다고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상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맞다, 시설부장님이 너 부르시던데? 얼른 가봐."
성찬은 몇 초 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동료에게 반대로 짧은 질문을 던졌다.
"부장님이?"
"그래."
퉁명스럽게 나온 고작 두 음절의 이 한 마디에 두통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자신조차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어지러운데, 시설부장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듣자 그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듯 했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부장의 사무실까지 간 것인지 성찬은 기억하지 못했었다. 사건 이후에서야 그는 동료들로부터 자신이 거의 관절 인형처럼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퀭한 눈빛을 덤으로 말이다.
문에 달린 작게 '부장실'이라 적힌 팻말은 진지한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노크를 몇 번 하고 문을 여니 50대 중반의 부장이 급하게 컴퓨터 속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는 반갑게 성찬을 맞아주었다. 그의 약간의 미소를 띤 얼굴은 성찬에게 오히려 공포감만 줄 뿐이었다.
"아,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성찬은 푹신한 가죽 의자에 앉아 나란히 부장과 마주보았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랐고 그저 빨리 시간이 흐르길 빌 뿐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주변에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됐을 테지. 그런데 조사해보니 자네가 마지막으로 Tulip.aic와 소통했다고 나왔네. 그래서 자네를 특별히 불러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하면-"
"… 죄송합니다."
"응?"
이젠 물러설 곳은 없다. 그냥 털어놓자. 성찬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일찍 들키나 늦게 들키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 뿐이었지만 어차피 밝혀진 사실이었기에 성찬을 전자를 골랐다. 부장은 그의 말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으로 멀뚱히 고개 숙인 성찬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뭐라고? 뭐가 죄송한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어제 제 컴퓨터가 고장나서 몰래 AIC용 컴퓨터를 사용했습니다. 그때 비트코인 시세도 확인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러니까, 아무래도 제가 어제 AIC용 컴퓨터를 건드린 게 그 AIC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저는… 저는 단지 검색하고 살펴보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시설부장은 성찬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자신도 모르는 일에 대해 말도 더듬거리며 자백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 그 일 말하는 거로군?"
부장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성찬은 놀랐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제 그 일이면, 나중에 따로 불러서 말하려고 했었는데."
"어, 네?"
"자네가 그 시설부 AIC 관리실에 들어간 건 이미 알고 있었네. 근처에 CCTV가 있었거든. 그래서 그 AIC한테 자네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사실만을 말할 뿐, 연관성은 적다고 스스로 말하더군. 그래서 그 일은 나중에 말해서 간단히 처리하려 했네. 그런데 이렇게 미리 말해주니 참 대단하구만."
"그럼 절 부르신 이유는…"
"자네가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까봐 Tulip.aic와의 면담을 부탁하려고 부른 거네. 아무래도 헛짚은 모양이군."
시설부장은 성찬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웃음을 쏟아냈다. 성찬은 멍하니 있다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된 일이었다. 자신의 탓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안도감이 오기도 전,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게 아니라, 다른 일 보고 괜히 저리기만 한 꼴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참던 성찬에게 시설부장은 문서 몇 장을 건네주면서 몇 가지 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냥 간단하게 물어볼 만한 질문 몇 가지를 넣어봤네.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사령부에서 이번 사건을 아예 새로운 SCP로 지정하려나 보더군. 그런 만큼 자네한테도 임무가 주어진 셈이니, 열심히 임해줬음 바라네. 나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상다미거든."
시설부장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뭐, 이미 몇 가지 물어보긴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네. 이번 건 그냥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긴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나오길 바라며 노력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거기에 3등급짜리 정보도 들어있고 하니까 괜히 이부잒으로 꺼내지 말고. 자네가 몰래 컴퓨터 사용한 건 나중에 처리할 거라지만 다음부턴 주의해주게."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만 가봐. 시간이 부족할 거야."
성찬은 관례적인 말을 하고 종이를 훑어보며 아까 들어올 때의 발걸음으로 조심스레 방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그는 건너편 벽에 몸을 잠시 기댔다. 여전히 머릿속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했던 생각이 풀리니 한결 나았다.
'아, 쪽팔려. 이게 무슨 꼴이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바닥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이던 성찬은 몸을 돌려 발을 재촉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아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새 사람이 퀭해 보인다?"
"말도 마, 이러다 진짜죽겠어. 게다가 며칠 전 일 때문에 팀장한테 까이기까지 하니까 장난 아니더라. 어찌 보면 그 일 때문에 이번 사건 처리에 엮인 거 아닐까, 나."
"네가 전에 말했던 고 팀장, 그 사람? 아이구야, 너도 참 빡센 직장 생활을 보내는구나."
자욱한 담배 연기가 깔린 흡연실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성찬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재욱은 다 핀 담배를 구석에 놓인 재떨이로 던졌다. 살짝 비껴갔다. 재욱은 혀를 한 번 차고 떨어진 담배를 주우러 몸을 숙였다.
"근데 너도 바쁘지 않아? 너 요원이잖아."
성찬은 재떨이에 주운 담배를 부비는 재욱에게 말을 걸었다. 재욱은 재채기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나도 너처럼 죽을 맛이지. 우리 같은 정보국 요원들은 평소에도 바쁜데, 이번 일 때문에 역정보도 유포해야지, 요주의 단체 놈들 감시해야지, 높으신 분들 회의 준비해야지… 아주 미칠 지경이야."
"이럴 때엔 말단만 죽어나가는구나."
"그래도 지금 보면 상부에서도 갈려나가는 분위기던데, 자기네 월급 걸린 일이라선가?"
재욱의 농담에 성찬은 피식하고 웃었다.
"월급이야 우리도 받잖아.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갈려나가는 거지. 그나저나 이번 일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될려나."
"내가 듣기로는… 일론 머스크한테 부탁한다는데."
"뭐?"
성찬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농담 같은 말에 당황, 아니, 황당하였다. 재욱은 아랑곳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니까,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줘라, 하고 부탁한다나 뭐나. 예전에 스페이스 X 관련해서 접촉이 있었나 봐. 미친 소리 같겠지만 전부 사실- 일 거야. 아님 말고."
"이 뭔… 그럼 머스크도 요주의 인물이라는 거야? 무슨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출신이래?"
"남아공 출신이지. 자란 곳은 캐나다지만."
"그래, 정-말 웃긴다. 그나저나 상부는 무슨 생각을 했갈래 그런 짓을 한데."
성찬과 재욱은 하얀 니코틴 안개가 짙게 깔린 흡연실에서 빠져나왔다. 열릴 때 문틈 사이로 연기가 새어나왔다. 성찬은 도저히 상부의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 수십 년간 무사히 일해오며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린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온갖 비정상인이 넘쳐나는 재단에서 그런 결정이 드문 건 아니었지만, 정말 이런 얘기가 진지하게 나와 채택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곧 에스씨피… 에이, 일련번호는 모르겠고, 그냥 이번 일에 대한 문서에도 실릴 내용이라 이렇게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보안부에 신고하거나 하지는 마라?"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왜 그런 아이디어가 선정된 걸까."
"뭐, 그렇게나 다른 대책이 없었나 보지. 나도 그런 아이디어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만 가련다."
"그래, 잘 가라."
재욱은 복도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는 성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성찬은 주변의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담배 냄새가 날까봐 손을 박박 닦았다. 세수도 한 번 하니 피곤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의 얼굴이.
'이대로 일만 하다가 죽으려나. 온갖 괴물 잡아 가두는 곳에서 갑자기 죽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그래서 뭘 하라는 거야?'
성찬은 답답한 자신에게 질문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수도꼭지를 잠갔지만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세면대에 고인 물에 둥근 파장이 일었다.
그때, 재욱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줘라, 하고 부탁한다나 뭐나.'
…
'그래, 이거다!'
성찬은 급하게 화장지를 뽑아 얼굴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지의 거친 표면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아다녔다. 아무도 그의 계획을 알아선 안 되었다. 마치 며칠 전 몰래 AIC 관리실로 들어갔을 때처럼. 결국 아까 손을 씻었던 화장실로 돌아갔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 성찬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휴대전화의 키보드를 연신 터치했다.
'일론 머스크한테 비트코인을 사라고 했다, 이 말이지? 그럼 당연히 가격이 오르겠지.'
비트코인 구매 사이트에 접속하니 아직 시원찮게 움직이는 비트코인 차트가 눈에 들어왔다. 성찬의 계좌에는 몇 개 정도 구매할 수 있을 만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안약과 영양제를 소모하면서 재단에서 벌어온 돈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성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인생 역전이다!'
기쁨에 젖은 표정으로 변기에 앉아 벽에 머리을 기대었다. 하얀색 전등이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굉장히 급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는 '환상에' 젖은 채 가만히 있기만 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 그래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말씀이군요."
둥근 안경을 올리며 예리한 눈빛의 남자가 성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 타자를 치며 그동안 성찬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고 있었다. 성찬은 애써 눈빛을 피하려 했지만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성찬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동료들에게 계획에 대하여 말하다가 적발된 거라는데, 인정하십니까?"
상대방의 집요함 때문에 지친 성찬은 빨리 대화를 끝내고 했다. CCTV 카메라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결과
"예, 예, 그렇습니다. 다 맞아요. 제가 SCP-899-KO, 이제 그거에 대한 격리 조치를 이용하려다가 걸린 거라고요. 이제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말해야 하나요?"
"발언이 번복될 수 있어 여러 번 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괜히 말 바꿔서 시간만 더 잡아먹지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하니 기분이 오싹했다. 그대로 어차피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별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포기의 행복감이었다.
"하필이면 술자리에서 정신이 나가 그러고 말았으니… 제 자신이 부끄럽네요."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떳떳해질 수 있으니 잘 된 것 아닐까요?"
"아니, 그게 뭔… 휴우, 됐습니다."
약한 조명이 책상에 나란히 앉은 둘을 비추었다. 은은한 빛깔의 검은 그림자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남자는 까끌거리는 자신의 턱을 만졌다. 성찬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몇 마디 해도 될까요?"
"네, 좋습니다. 뭐든 말해보시죠."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저는 모든 일을 제 불운 때문이라고 탓했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랬죠. 근데 지금 보니 지금껏 전 불운하진 않았나 봅니다. 그냥 제 입이 오두방정이었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이번 기회에 좀 달라지고 싶다는 거죠. 몰래 한 짓 때문에 괜히 마음이 찔리거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먼 행운을 쫓는 건 이제 그만두려고요. 당연한 얘기지만요."
남자는 엉뚱하게 들릴 법한 성찬의 말을 곱씹어보더니 말을 꺼냈다.
"뭐… 그런 거야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죠. 누구나 죄책감은 느끼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려나요…"
성찬은 고개를 들어 잔잔히 비추는 조명을 보았다. 부드럽게 나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포근한 기분이었다. 나른하였다. 남자는 그런 성찬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이내 성찬은 갑자기 남자를 바라보더니 비장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성찬은 잠시 뜸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비트코인 얼만지 아시나요?"
"…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