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다섯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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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빠가, 달로 가야 한다고 그랬어요."

 흙먼지 구름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달을 가리키며 아이가 말했다. 여자는 그런 아이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야에는 이미 오래 지나버린 언젠가의 일이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에, 달로 가게 됐습니다.
 -그런 것으로 굳이 연락했니, 누누히 말했는데도 말이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이해할 필요가 없단다.
 -아이에겐 다를 겁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그 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무엇을 말이냐? 내 선택을? 아니면 ―

 "달 말이에요. 루시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자가 회상에만 빠져있어 풀이 죽은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시 여자의 생각을 물었다.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 다시 생각을 옮겼다. 달? 하긴, 지상은 이 난장판이 되었어도 달이라면 무사하겠지. 영원히 안전할 리는 없고 우리가 갈 수 있을 리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아이의 천진한 믿음을 굳이 깨줄 필요는 없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 그렇겠네. 그러면 달까지 어떻게 가지?"
"걸어서요!"
"…뭐라고?"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좀처럼 듣기 힘든 것이다. 아이도 여자의 웃음을 처음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 덩달아 헤실거렸다. 둘은 서로의 웃음을 보며 더욱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이런 광경은 그것이 일어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주변에서 힘없이 생필품을 주워모으던 부랑자들이 그들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있는 것도 그 까닭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인류, 아니 지구의 종말이 바꿀 수 없는 미래로 확정된 다음부터는 매일이 그저 하늘을 덮은 흙먼지처럼 덧없는 것이었으니까.
 

- · · - - -

 
 고비 사막이 두동강 났다는 속보는 제법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울란바토르 바로 아래의 지각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5의 대지진은 몽골 전역과 중국 내몽골 지방을 덮쳐 수백만 명을 죽고 다치게 만들었다. 아시아 내륙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강진에 세계가 놀랐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몽골 지진은 잊혀져가는 것 같았다.

 착각을 정정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대지진으로 악타우와 아티라우는 소멸, 그곳에 생긴 거대한 크레이터로 카스피 해의 물이 쏟아들면서 수습조차 못한 채 지역 전체가 수몰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도 지진을 동반한 지각 융기가 벌어져 겨우 안정되었던 지역 치안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고작 일주일 후에 두 지역에 정확히 정반대의 일이 다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악타우 해로 명명되기 직전이었던 호수의 물은 솟구치는 땅에 밀쳐지면서 그대로 해일이 되어 카스피 해 연안 국가들을 쓸어버렸다. 지각 운동은 또한 아프간 땅에 아가리를 벌려 솟아올랐던 흙더미와 난민촌을 전부 집어삼켰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순수하게 사망자 수 만으로도 이미 3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대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학자들 역시 지질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에 머리를 쥐어싸맸다. 그 무렵, 여자는 다른 간부들과 함께 사태의 진정을 위해 인위적으로 개입해야 할 지 격렬하게 토의하고 있었다.

"할 수 밖에 없어. 더이상 각국 정부가 비밀을 유지해줄거라 장담할 수 없다고."
"어떻게든 '규격 외의 대지진'이라는 걸로 대중이 납득했다. 현 시점에선 두고보는 게 최선이야."
"활동을 시작한 이상 사태는 반드시 반복돼! 더이상 모른체 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걸 몰라?"
"3천만 명이야, 3천만! 이만한 사망자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당신 말대로 앞으로 몇 번, 어느 정도로 반복될 지 알 수도 없는 마당에 매번 기억 소거로 무마할 수 있을 것 같나!"
"아직 3천만이지. 지금 안하면 늦어! 이 이상 피해가 누적된 후에는 더더욱 돌이킬 수 없어!"
"나도 대규모 소거 절차는 반대하네… 차라리 제한적으로 정보를 공개해서 앞으로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르지."
"진심이십니까? 세상이 뒤집힐 겁니다!"
"여차하면 핵폭격을 해야 하는 판이야. 어설프게 왜곡하고 지우며 무마하려다간 무의미한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어. 그렇다면 차라리 새롭게 밝혀진 공동의 적을 모두가 인지하는 편이 사태를 온건하게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네."
"앞으로 벌어질 지 모를 혼란을 막기 위해, 대원칙까지 깨면서 지금 당장 거대한 혼란을 초래하자는 말이나 다름 없단 말입니다!"
"그런 논의로 지체할 시간이 있으면, 당장 핵을 투발해 놈을 제압하고 대규모 기억소거 절차를 개시해야…!"
"급보."

 언제나 침묵을 지키던 간부의 발언으로 한순간 조용해진 회의장에서, 이 정적을 만들어낸 사내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회의실 한켠에 늘어선 화면들에는 '시베리아 대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 속보와 방금 들어온 긴급 보고서가 번갈아 표시되었다. 간부는 그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전달했다.

"두 기지 연락 두절. 핵탄두 원격조작장치 응답 없음… 무력화 추정."

 초조한 침묵 끝에, 여자가 입을 떼었다.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은…?"
"…부정."

 회의장에 모여앉은 모든 참석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면 할수록 '이 일은 이제 우리 손을 벗어났다'라는 불쾌하고 절망적인 판단만이 또렷해졌다.

"아무래도, 정보 공개 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에 이제 다들 동의할 것 같네만."

 나이든 간부의 발언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 채 회의는 끝났다.
 

· - · - · -

 

『이곳 러시아 비상대책부 청사 앞은 어제 발표된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려는 인파로 가득합니다. 곧 블라디미르 푸츠코프 장관의 기자회견이 시작됩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푸츠코프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핏>

『―니까 현재까지 일어난, 몽골과 카자흐-아프간,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대지진들이 땅 속에서 발버둥치는 "거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인데요. 이 정보를 믿어도 될까요, 류부신 박사님?』
『어제 미국과 러시아 정부가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양국이 사이좋게 맛이 간 게 아니라면야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한 공식 발표를 신뢰하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
『청취자분들께서도 지금 푸츠코프 장관의 기자회견이 진행중이라는 소식을 알고 계실텐데요, 저희 프로그램은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그에 대해―』

<핏>

『―재 심각한 지반 침하와 가스 분출이 발생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호수 부근에 접근하지 마시고, 주변 주민들께서는 속히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통부의 소콜로프 장관은 현재 부근의 열차 운행을 전면 중단했으며―』

<핏>

『―스 속보입니다. 푸츠코프 비상대책부 장관이 지금 진행중인 기자회견에서 예의 "거인"에 대한 추가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발생 이후 한동안 기밀 취급되었던 시베리아 대지진 당시의 사진도 여럿 공개되었습니다. 땅 속에서 머리를 드러내며 지진을 일으키는 거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루미얀체프 기자가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푸츠코프 장관이 사진이 인쇄된 판자를 들어보이자, 헬기에서 촬영된 영상의 정지 화상에 찍힌 거인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무너져내리는 흙더미 사이로 이마와 코, 입술이 확실하게 찍혀있습니다.』
『이것은 합성이나 연출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 지표면 아래에 거대한 인체 형태의 객체가 존재하며, 이것이 최근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장관은 이 거인의 정보를 공개하기 전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와 협동하여 면밀한 조사를 거쳤으며 세계적인 공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미지의 거인에 대한 공포는 시민들 사이에 확산―』

<피빗>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평범한 정규 방송을 찾아 열심히 채널을 돌리고 있자, 여자는 카 라디오를 아예 꺼버렸다.

"내가 늘 말했지. 곁가지에 현혹되지 말고 뿌리를 찾으라고."

 남자는 머쓱해하며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매스컴은 하루 종일 거인, SCP-791-KO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국경 너머의 채널을 켠다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터이다. 무지를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현대를 이룩해온 것이 인간이라 하여도, 마지막에 기자가 말했듯이 결국 우리 인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품는다. 따라서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궁금증에 대답하려는 것, 다르게 말하면 그 욕구를 후벼파서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여자는 더욱 강하게 악셀을 밟아 바이칼 호로 향했다. 여자는 무지를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아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말없이 차를 몰고 있었다. 보답받을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자의 바람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이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겠는데."

 지구가 살며시 떠 보인 수줍은 푸른 눈.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였던 바이칼은 쩍 마른 바닥 위에 애처로운 토착 생물들을 남겨둔 채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한때 호숫가였던 땅덩어리들은 비틀어지며 무너져내려,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함께 내려앉아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도로 역시 한계를 맞이한 구간을 내보였기 때문에 여자는 차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에 멍해져있던 여자는 이윽고 정신을 차려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었을 건물을 찾아 분주히 시선을 옮겼다. 무너진 호숫가에 걸터앉은 채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러시아 경찰에 의해 접근이 차단된 콘크리트 폐허가 바로 제7912 대응기지라는 것을 일행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한 쪽 벽이 완전히 파괴된 그 건물은 원래 지하 깊은 곳에 기폭 준비를 마친 채 상시 대기중이었어야 할 핵탄두를 관리하는 시설이었다. 그것은 이번 사고로 유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된 물건이었다. 남자는 호수였던 공간과 기지였던 구조물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곤 의문을 표했다.

"기지와 핵탄두가 고작 지반침하만으로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무력화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특별경계령이 내려진 준활성화 SCP 대상을 직접 관할하는 대응기지라면 더욱이요."

 여자는 동의한다는 표시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여자는 보고받은 정보를 곱씹고 있었다. 이틀 전, 재단 특무부대가 연락이 두절된 두 대응기지에 긴급히 파견되었다. 그들은 무사히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복귀했지만, 기지의 붕괴 상태를 수습하는 데는 실패했다. 탐색용 나노로봇 시스템 바이슨이 오작동하고 통신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작전이 크게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기지 안은 어째서인지 유독가스로 가득 찬 상태였고 구조된 인원들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마저도 통째로 SCP-791-KO에게 삼켜져서 진입조차 불가능했다는 제7911 대응기지보다는 양호한 결과였다.

"첫 번째."

 여자가 입술을 떼었다. 남자는 여자가 뭘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기지 인원들은 누구도 탈출하지 않았다. 이것은 뭘 의미하지?"
"비상시 대응요령에 대한 훈련 미비가 아닌 이상, 극한상황에서 끝까지 시설을 컨트롤하려 한 것으로 봐야 타당하겠죠."

 여자는 대답에 만족했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까닥여보이고 질문을 이어갔다.

"좋아, 두 번째. 그렇게 직무에 충실했던 인원들은 기지를 사실상 상실하고 전원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외부에 연락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기연락이 두절되어 구조대가 파견되었지. 이것은 뭘 의미할까?"
"연락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할 수 없었다고 봐야겠군요."
"세 번째. 현장에 도착한 특무부대의 바이슨과 통신 장비가 모두 기능 이상을 보였다. 우연으로 생각해야 할까?"
"우연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기지의 통신 두절까지 생각하면 확률은 낮죠."
"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인 가정은, 이 일대에 모종의 통신 방해나 전자기 펄스가 있었다…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되풀이한 구절의 의미를 깨닫고 차로 돌아가 라디오를 켰다. 방금까지 멀쩡하게 작동하던 라디오는 어느새 먹통이 되어있었다. 소음에 눈살을 찡그리며 남자가 말했다.

"이 일대에 계속되고 있다… 로군요."
"그래. 반갑지는 않군. 네 번째,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런 현상을 초래하고 있을까?"
"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기지에서 관리중이던 핵탄두가 폭발해 발생하는 전자기 펄스지만,"
"하지만?"
"15 메가톤 규모입니다. 그런 게 지하에서 터졌다면 지반침하가 아니라 크레이터가 생기고도 남았겠죠. 반대로 지형에 변화가 없을 정도의 작은 폭발이었다면 전자기 펄스의 영향이 이렇게 강할 수는 없고 말입니다."
"특무부대가 회수한 로그 자료에도 기지가 무력화되기 전에 핵폭탄의 신관을 해제한 기록이 남아있었어. 그럼 핵폭발이 일으키는 EMP는 용의선상에서 배제됐고, 다음은?"
"적대 단체의 재밍도 설득력이 떨어지죠. 재단 자산이 퇴거하고 정부가 나서서 부근을 통제 중인 지금도 문제는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또 7912기지는 변칙개체를 직접 보관하진 않고 있으므로 변칙 특성에 의한 현상도 아닙니다."
"아니지, 하나 있잖아."

 여자는 발밑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무심코 시선을 따라 옮기던 남자는 순간 여자의 용의선상에 무엇이 잡혔는지 알아챘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진 못했다.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여자가 다시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섯 번째. 이곳에 벌어진 현상은 크게 네 가지, 바이칼 호가 사라진 것, 지반이 불안정해진 것, 유독성 기체가 분출되는 것, 그리고 계속되는 전자기기 이상이야. 이것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넷 모두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면 하나의 원인이 있다 봐야겠죠."
"맞아. 있을만한 다른 가설들은 모두 배제되었고, 네 현상을 모두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마지막 후보가 이 아래에 있지."
"SCP-791-KO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놈에게 그런 특성이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변칙 특성이 있다곤 말한 적 없어. 그저 돌덩어리 거인이 숨을 쉬고 심장이 뛴다면 어떻게 될 지 가정해봤을 뿐이야."
"…아하."

 남자는 그제야 여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설명은 이러했다.

"거인이 누운 채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가슴팍이 움직인다면, 그 왕복 운동 때문에 지반은 한 번 큰 힘을 받으며 들어올려진 뒤 지하에 바이칼 호의 물이 전부 들어가고도 남을 큰 공간을 남긴다. 또 시베리아 토지의 영구동토가 파손되면서 얼어있던 유기물과 메탄이 유독가스의 형태로 분출된다. 갑작스런 융기와 동토층의 소실로 지반은 위태로운 흙더미로 변해버린다. 지질 원소와 금속 원소가 혼합되어있는 거대한 심장이 강하게 뜀박질치면서 유도하는 자기장은 충분히 EMP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적어도 설명에 미흡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주장에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도 알고 있었으리라.

"합리적인… 의심인 것 같습니다. 단지 당장 검증할 순 없다는 점이 문제겠지요."
"검증, 그래. 중요한 문제지. 당장 검증해낼 수 없는 가설이야. 놈과 지각을 구분해 특정짓는 것조차 쉽지 않고, 특정하더라도 역학조사는 최소 수 년. 틀린 판단이었다면 시간 낭비가 너무 심각하고, 가설이 옳다고 밝혀지더라도 너무 늦어."
"하지만 확실한 정보가 없으면, 평의회와 각국 정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그래. 지금만큼은 확실함에 얽매여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납득해주면 좋겠는데…"

 엄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하던 여자는 휙 돌아서서 선언했다.

"7911 기지로 가겠어."

 

· - - · · -

 
 렌스크의 난민촌은 흉흉했다. 올렉민스크가 통째로 삼켜질 때 가까스로 살아나온 피난민들과 지진의 여파로 대피한 주변 주민들, 렌스크를 차마 아직 떠나지 못한 잔류민들이 어지러이 뒤얽혀 천막과 판자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어차피 거인의 누운 형상을 생각하면 가슴팍과 목덜미 언저리에 해당할 뿐인 이곳도 얼마 전 지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머지 않아 거인이 몸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베리아와 몽골 대부분 지역과 함께 사라져버릴 운명에 놓여 있었다. 비극을 불러올 거인은 저 멀리에 얼굴을 땅 위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경찰의 접근금지선 테이프를 들추며 통제구역을 벗어날 때 여자의 표정에는 좌절과 결의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좌절은 믿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 건물을 찾아 시선을 바쁘게 옮겼지만 그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다. 보고는 정확했다.

 7911 기지는 통째로 잡아먹혔다.

 거인이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지상으로 내밀었을 때, 기지는 정확히 입의 중심지에 위치해있던 탓에 연락도 탈출도 하지 못한 채 단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기지 지하에서 대기중이던 핵탄두도 통째로 유실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재단 측에서 준비한 제어 수단은 전멸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노력은 커녕 시도도 해보기 전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791-KO를 저지하는 데 핵무기가 효과적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통제구역 밖에서 차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여자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뭔가 발견하시지 못했습니까?"
"그래. 깔끔하게 삼켜버렸어."
"어떻게 저 안을 조사할 방법은…"
"부수고 들어가려 했다간 쓸데없이 자극할 뿐이야. 러시아를 비롯해 민간정부들이 나서서 대대적인 비파괴 검사를 실시할 테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 문제는…"
"문제는…?"
"저놈, 호흡기관이 있다면 소화기관도 있지 않겠어?"
"…조사 장비들이 도착하고 검사를 실시할 땐 이미 늦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늦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어."
"예?"
"오히려 그 쪽이 우리에겐 희망적일 수도 있겠다는 거지."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좌절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항상 보아왔던 단호한 결의에 찬 입매가 돌아와 있었다.

"우선 식사라도 하지. 저게 당장 또 일을 벌이지도 않을테니, 요기부터 하고 찬찬히 이야기하자고."
"알겠습니다. 이 난민촌에 괜찮은 가게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배나 좀 채우자니까 무슨 만찬을 찾어? 매번 말하지만, 곁가지에 현혹되지 말고…"
"뿌리를 찾아야 돼요!"
"…어?"

 언제나의 잔소리를 꺼내려던 여자의 말문을, 갑자기 끼어든 귀여운 목소리가 막았다. 두 사람은 놀라서 잠시 얼이 빠져있었지만 곧 여자의 소매를 당기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곱 살 남짓한 아이의 천진한 웃음을 보고, 여자는 빙긋 웃으며 몸을 숙여 여자아이와 눈을 맞춘 채 대화를 시작했다.

"꼬마야, 내가 뭐라고 할지 어떻게 알았니?"
"우리 아빠가 맨날 하는 말이에요, 헤헤."
"어이고야, 아버님이 똑똑하시구나. 내가 모실 현자님은 한 분으로도 벅찬데."

 농담섞인 투정으로 잔소리에 반항하는 남자를 여자가 째려봤다. 아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모바일]

"언니랑 오빠는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어… 그러니까…"
"밥 먹을 곳을 찾고 있었어."

준비해뒀던 위장 신원을 대려던 남자가 문득 그런 복잡한 얘기를 아이가 알아들을까 걱정하느라 허둥대고 있는 틈에 대신 여자가 간단히 답했다. 여자의 답을 들은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아이는 활짝 웃었다.

"나도 먹을 거를 찾고 있어요!"
"정말? 우연이네. 먹을 거 뭘 찾고 있었는데?"
"뿌리요! 씹고 있으면 물이 나와요. 단 것도 있어요."
"…뭔가, 묘한 기시감이 드는데요."

남자는 헛헛 웃고는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렇다고 이런 어린 여자애가 혼자 돌아다니다니 위험하네요. 꼬마야, 엄마는 같이 안 오신거니?"
"그래. 엄마는 어디 계셔?"
"엄마는 그, 그… 배구쏘?"
"배급소?"
"응, 배급소! 코포 아저씨네랑 배급소에서 귀리빵이랑 죽 타오신다고 했어요. 언니 오빠도 같이 먹을래요?"

아이가 갑작스럽고도 천진난만한 제안을 해오자 여자와 남자는 뒤로 몰래 속닥였다.

"배급소라… 식당같은 건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가 보네요."
"허튼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어떡하실 거에요?"
"뭘 어째. 좋습니다하고 끼어서, 쥐꼬리만할 게 뻔한 배급식 뺏어먹을 생각이야?"
"아뇨아뇨, 그건 그렇다 쳐도 애는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흠… 그건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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