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 태양이 서서히 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고, 밤이 깔려있던 공동묘지의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기 시작한다.
수십개의 작은 묘비들 중 한 묘비 앞에 옷인지 누더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뭔가를 걸치고 있는 늙은 여성이 누워있다. 주변에 술병 서너개가 굴러다니고 있고, 낡은 모자 하나도 떨어져있다.
방금 잠에서 깬 여자는 그 상태 그대로 눈만 껌뻑거리고 있다.
태양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고, 한기로 가득찼던 공기가 점차 온기를 띄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경쾌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천천히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뚜두둑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그녀가 입가에 침을 닦고 눈가에 눈곱을 뗀다.
그녀는 일어서서 잠시 멍을 때리다가, 묘비를 내려다본다.
빅터 스톤
1984 ~ 2004
"그의 헌신과 친절에는 깊은 감사를 보내고, 그의 작은 흠들에는 눈을 살짝 감으리라."
"개뿔."
그녀가 짧게 읊조리고, 빈 술병 하나를 집어 묘비에 던진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 새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이른 아침을 울린다.
그녀는 헝클어지고 떡진 머리 위에 모자를 대충 씌우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에잇취!" 재채기 소리가 다시 이른 아침을 울린다.
바쁘게 비가 내리는 거리에 우산을 쓰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 거리를 걸어간다.
그녀는 한 건물 문간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녀 앞에 작은 깡통 안에는 동전 몇개가 들어있다.
그녀 앞으로 한 여자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이봐, 아가씨. 잔돈 남는 거 좀 있수?"
여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친다.
그녀 앞으로 한 남자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이봐, 신사분. 잔돈 남는 거 좀 있수?"
남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친다.
그녀 앞으로 한 남자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이봐, 젊은이. 잔돈 남는 거 좀 있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동전 몇개를 꺼내 깡통에 넣는다.
"고맙수."
"뭘요. 이런, 다 젖으셨군요. 잔돈 때문에 밖에 나와있기엔 너무 가혹한 날씨 아닌가요?"
"이 정도쯤이야. 젊은 사람이 마음씨가 곱구만. 몇살이지?"
"스물셋입니다."
"아, 나도 자네 나이의 아들이 하나 있었지. 지금은 땅 속에 누워있지만. 산업재해라나 뭐라나. 산업재해는 망할, 회사가 뭔가 뒤가 구린 것 같았어. 내가 나이를 괜히 먹은 줄 아나."
"그렇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갈 길이 바빠서요."
"잘 가시게."
젊은이는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며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행운을 빕니다."
"날 도우려면 행운보다 더한 게 필요할거요. 마음씨 좋은 양반."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드님 일에는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해당 사고에 대해 저희 시체 비누 주식회사 측의 책임은 일절 없으나, 위로 차원에서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그녀는 한 골목에서 편지를 읽다 말고 북북 찢어버린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동봉되어 있던 돈봉투를 쳐다본다.
넘어진 쓰레기통을 뒤지고있던 개 한마리가 쓰레기통에 쳐박았던 머리를 빼내고 그녀를 향해 연신 짖어댄다.
그녀는 돈봉투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향해 짖어대는 개를 쳐다본다. 개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더 거세게 짖어댄다.
그녀는 돈봉투와 개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개는 점점 위협적으로 짖으며 다가왔다.
"그래. 내가 사는 게 죄지."
그녀는 돈봉투를 개한테 던져버리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는 그냥 가버린다. 개는 돈봉투를 미친듯이 물어뜯는다.
그녀는 몇분 뒤에 미친듯이 골목으로 다시 뛰쳐들어왔다.
그녀는 아직도 돈봉투를 물어뜯고있는 개를 걷어차고 굴러다니던 철봉을 집어들어 개를 향해 마구 휘둘러댔고, 개는 겁을 집어먹고 깨갱거리며 도망쳤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갈기갈기 찢어져있는 돈 조각 더미에서 그나마 멀쩡한 지폐 몇장을 챙기고는 다시 걸어갔다.
총 20파운드였다.
공동묘지에 밤의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그녀는 누군가의 묘비에 기대어 앉아있다. 아들의 묘비를 마주본 상태로.
그녀는 20파운드를 전부 술을 사는데 썼다.
그녀는 술 한병을 다 마실 때마다 술병을 아들의 묘비에다가 던졌다. 그리고 울려퍼지는 쨍그랑 소리를 들었다.
묘비에 술병이 날아들어 부딪히고, 병은 부서지고 부서져 제 육신의 조각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그녀는 울려퍼지는 쨍그랑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또 한병을 집어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쯤 마시다 말고 술병을 묘비에 집어던진다.
병이 제 몸의 내용물을 쏟아내며 산산이 부서지고, 그녀도 제 몸의 내용물을 잔디 위에 쏟아낸다.
토사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그녀는 그 위에 다시 한번 쏟아낸다. 토사물에서 술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그녀는 미친듯이 숨을 고르고, 줄줄 흐르는 콧물과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