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 재단 대한민국 지역사령부 - 임시 설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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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제01K기지

- 한국사령부 소속 기지 목록 준완본

- 12·5 공동성명

- 국가초상방재원 허브

- 사령부 역사

주요 설정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변칙 문제는 재단 한국사령부가 독점적으로 관할했다.
  • 1970년대에는 한국정부가 독자적 대변칙 역량을 갖추고 재단을 배제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1981년 피어슨 조약으로 한국의 변칙기구는 해산, 한반도 남부의 변칙문제는 완전히 재단에 이양되었다.
12.5 합의에 따라 피어슨 조약이 개정되고, 대한민국 국가초상방재원이 2018년 창설되었다.
  • 2018년부터 대한민국에는 재단, GOC, 방재원이 경쟁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재단은 북한에서 SCP-1427 관련 임무 외엔 거의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 북한은 국가보위성에 이상교화국을 두어 직접 변칙 문제를 다루고 있다.
  • SCP-2578과 무관하게, 지역사령부 설정에서 SCP-1427은 무효화되지 않았다.


SCP-KO의 설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1945년 이전


식민지배와 전쟁에 의해 한반도가 재단의 영향권에 들지 못하다.

SCP 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및 제7차 오컬트 대전에 깊게 관여했으며, 연합국(특히 연합국 오컬트 구상)과 힘을 합쳐 추축국의 초상조직들과 싸웠다. 일본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는 재단에 있어 적지였으며, 이 시기 재단은 한반도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1945년-1950년


일제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되고,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한반도에 주둔하다.

1945년 한성에 SCP 재단 조선출장소(1945-1948)가 설립되었다. 많은 인원은 북미에서 파견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비공식 활동하던 재단 인원 또는 재단에 투항한 구 일제 출신 인원도 포함되었다. 출장소장은 초기파견부대를 이끌던 콜 스커더Cole Scudder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재단은 한반도 전체를 관리지역으로 삼는 통합된 지부를 설치하길 원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출장소의 활동 영역은 38선 이남 미군정청 통치지역으로 제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으로 남북에 별개의 정권이 들어서다.

이후 한반도 남부의 재단 조직은 한국출장소(1948)를 거쳐 대한민국 지역사령부(1948-)로 확대됐다. 스커더 중령이 그대로 초대 관리이사관을 맡았다.

이 시기 (물론 해방 이후) 한반도의 재단 시설은 서울의 구 제01K기지, 부산의 제02K기지가 존재했다.
이 무렵 혼돈의 반란이 재단에 반기를 들었지만, 신생 한국사령부는 이에 휘말리는 일을 피했다.

스커더 이사관은 베를린 봉쇄 사건 도중 유럽으로 차출되고, 후임 관리이사관으로 조지 피어슨George Pearson 대령이 부임했다.


1950년-1953년


북한군이 기습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다.

서울이 함락되면서 구 제01K기지가 파괴되었고, 한국사령부는 제02K기지로 중앙기지 기능을 옮겼다.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다. 전쟁이 장기화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84호에 따라 유엔이 참전을 결의하고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재단 또한 상실한 자산을 회복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창설 직후 연합국오컬트구상 시절의 군사부문을 대거 감축했던 GOC는 유엔군에 참여하지 못했다.

  • 이는 결론적으론 한국전쟁이 제8차 오컬트 대전으로 비화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는데, 재단이 한반도에 적극 개입하는 동안 GOC는 북미와 유럽에서 재군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에 GRU-P가 한반도에 변칙자산을 전개하는 걸 꺼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전선에 직접 투입된 공산권측 변칙 군사자산은 북한 총참모부 정신전자공학국과와 중공 인민지원군의 것으로 한정되었으며, 이는 소련이 확보한 것들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참전 직후 SCP 재단은 당시 변칙위협에 대응할 역량이 없던 한국 정부로부터 변칙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한국사령부는 북한의 변칙자산을 탈취하거나 혼란스러운 한반도에 풀려다니는 여러 변칙개체들을 확보하면서 보유 SCP 대상을 급속도로 늘려갔고, 시설 역시 부대운용과 확보물 격리를 위해 대거 신설하게 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다.

재단은 유엔군측 참전세력으로서 정전협정문 부록에 조인했으며, GOC는 유엔 소속의 미참전 중립세력이라는 명목으로 중립국감시위원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쟁 행위가 중단되고, 비무장지대가 설정되고, GOC 대표단을 포함한 중립국감시위가 판문점에 주재하는 것으로 휴전 협정이 발효하였다.

  • 협상 당시 북한 지역에서의 활동 권리를 계속 주장하던 재단에 의해 합의가 지연되었다. 유엔은 중립세력인 GOC가 남북 양지역에서 모두 활동을 포기하는 조건을 제시했고 재단이 이를 받아들이고 북한 지역을 포기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1953년-1960년


재단이 대한민국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다.

재단은 비록 휴전선 이북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최대의 경쟁자인 GOC와 GRU-P가 남한 지역을 포기하는 반대급부를 얻었다. 한국 정부가 전후에도 변칙 문제를 재단에 계속 위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사령부는 대한민국 영토에서의 독점적 활동 권한을 가진 유일한 조직이 되었다.

1957년 소련 키시팀 실험에 의해 SCP-1427이 활성화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핵폭격으로 수습되었으며, 소련이 정부간 연락망을 통해 재단의 협조를 요청했다. 재단은 SCP-1427을 우크라이나 제67기지에 격리했다.

같은 해 피어슨 관리이사관이 미국으로 복귀하고 제02K기지 기지 이사관보 델러노 필 워커 박사Dr. Delano Phil Walker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워커 이사관은 이승만 행정부로부터 한반도에서의 배타적 입지를 보장받아 지역사령부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안정시키는데 공헌했다.

이 시기 한국사령부는 제02K기지를 필두로 하여 50개 이상의 시설을 보유했다.


1960년-1968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다.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후 망명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지만, 재단과의 계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무너지다.

장면 내각이 해산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전권을 쥐었다. 미국은 이를 공산주의 쿠데타로 의심했으며, 재단은 군이 권력 전면에 나서면서 계약을 파기할 것을 우려했다. 박정희 군부는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적극적으로 협력 노선을 표방했으며, 그 결과 변칙 문제에 대한 전권 위임 계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2년 워커 관리이사관이 퇴임하고 엄정인 박사Dr. Eom Jeongin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후로 한국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은 모두 한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이 부임되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 전쟁으로 냉전 구도가 요동치다.

UIU와 GRU-P가 활동을 늘리는 등 각국의 행보가 점차 가열된다.
한국은 베트남에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러나 재단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행보에 동조하지 않고 국제초상안보기구로서 중립적 입장을 내세웠다. 케네디-존슨 행정부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한국 정부 또한 재단이 자신의 활동 유불리에 따라 남한과의 계약을 준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으론 냉전의 격화가 초상사회의 암묵적 질서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정전 이후 재단 외의 초상 활동이 상당히 억제되어오던 대한민국에도 다양한 요주의 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68년-1979년


68운동으로 유럽・북미・일본에서 사회・문화적 충격이 퍼져나가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과 김신조 사건으로 반공주의가 고조되어있던 한국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각종 GOI 활동이 남한 내에 두드러지다. 제01K기지가 재건되다.

정권과 유착이 의심되는 이자메아의 숨은 장군, 20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능사사의 재건활동과 뱀의 손 가맹(1970), 북한 정신전자공학국과 이상교화국(1973-)의 남파공작, 부서진 신의 교단의 전도운동 등 다양한 GOI들이 남한 지역에서 분주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령부 임무영역의 양적 확대, 제02K기지의 포화, 한국 정부와의 협력 약화, 각종 GOI의 활동 증가 등 당면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엄정인 이사관은 대규모 행정시설로써 제01K기지를 다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71년 현재의 위치에 완공된 제01K기지는 현재까지 사령부 중앙기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 재단과 관계를 재설정하고 독자 노선을 표방하다.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줄이겠다는 취지의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결정했으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검토하기 시작하여 한국 정부의 반발을 샀다. 미국과 재단이 더이상 국가와 정권의 안위를 담보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미국과 재단에 의존하던 안보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이 중 대표적인 행보가 독자 핵개발과 중정 산하의 독자초상조직 육성(1973-1981)이었다.

미국과 재단은 당연하게도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반기지 않았다. 엄청난 압력과 견제가 물밑에서 오갔지만, 한국은 폐쇄적으로 대응하며 각 분야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는다.


10월 유신과 부마 항쟁 등 국내의 정치 상황이 계속 불안정으로 치닫다.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 체제 구축을 시도하면서 유신 개헌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이 시기 한국 정부는 코리아게이트와 김대중 암살미수사건 등으로 미국과 관계가 극도로 험악해졌으며, 카터 행정부가 한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는 등 갈등이 표면화된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지지가 약화되면서 군사독재를 규탄하는 시민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기 시작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력진압으로 돌파하고자 하면서 유혈 충돌이 예고된다.

이러한 한국내 제반 사정의 혼란 속에서 엄정인 이사관은 한국사령부에 가해지는 도전들에 최선을 다해 대처했으나, 끝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1976년 사임했다. 그 후임으로는 제니퍼 "올라시" 양Jennifer "Olash" Yang 광역정보국 1차장이 내정되었다. 첩보와 위기관리에 전문성을 가진 신임 올라시 이사관의 지도 아래 한국사령부는 대정부 비밀활동을 늘린다.


1979년-1981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다.

박정희가 피살되고 김재규가 체포되면서 10・26 사건이 허무하게 마무리된 뒤, 당시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과 하나회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재단은 한국전 이후로 지켜온 현실정치 불개입 원칙을 따랐고, 미국 카터 행정부는 남한 정권 붕괴의 국제안보적 여파와 정권 말기의 대외개입 부담을 저울질한 끝에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묵인했다.


피어슨 각서가 체결되어 한국사령부의 입지가 다시 안정되다.

전두환 제5공화국 정부는 취약한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기존에 진척되고 있던 핵개발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마찬가지로 재단과의 적대 관계도 정권에 유리할 것이 없다 여긴 전두환 정권은 관계 정상화 의사를 타진, 1981년 「한반도의 변칙 문제에 관한 한・재단 합의각서」를 체결했다.

노태우 보안사령관과 조지 피어슨 전임 관리이사관 사이에 체결되어 흔히 「피어슨 각서」로 통칭되는 이 합의문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⑴즉각적으로 ⑵심대하게 침해하지 않는 모든 변칙・초상현상은 재단에 일임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각서에 따라 한국은 독자 초상기구를 폐지하고 다시 재단과의 완전협력 체제로 복귀했다.


1981년-1987년


SCP-1427의 격리 장소가 북한으로 이동되다. 류경 기지가 건설되다.

소련의 정치상황 변화가 SCP-1427의 격리 조건에 점차 부적합해지면서, 완전한 독재정치 체제가 존속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격리장소를 물색한 끝에 SCP-1427을 북한으로 옮길 것이 결정되었다. 북한은 이를 거부하려 했으나, 재단 측에서 체제보장 노력과 현금지원 및 1427 문제 외에 북한 내 불개입을 조건으로 협상한 끝에 1986년 새로운 격리 절차가 이행될 수 있었다. SCP-1427의 격리를 위해 류경 격리작전시설이 건설되었다.


6월 항쟁으로 제5공화국이 무너지다.

대한민국의 헌정이 제6공화국으로 이행되나, 피어슨 각서의 효력에는 아무 지장이 발생하지 않고 한국사령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국 정부와의 충돌이 더이상 우려되지 않으므로 올라시 이사관은 광역정보국장으로 영전하고 김정회 박사Dr. Kim Jeonghoe가 사령부 관리이사관으로 취임했다. 김정회 이사관은 군사정권기 지나치게 강화되었던 대정부 활동을 감축하고 현재의 임무체계를 정립했다.


1987년-2012년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다.

동유럽에서 촉발된 연방 구성국들의 자유화 바람, 체르노빌 사태의 후유증 등이 복합적으로 소련 체제를 덮친 끝에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최종적으로 붕괴했다. GRU-P 또한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적성세력이 사라진 UIU도 단계적 감축과 약체화의 길을 걷게 된다. 세계를 가르는 진영의 선이 사라지면서 재단의 입지가 결정적으로 강화되지만, SCP-1427의 계약에 묶인 북한 지역만큼은 이 경향을 비껴간다.


북한 정신전자공학국으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사태가 한반도 초상사회를 들쑤시다.

※) P국 쿠데타 미수 스토리라인의 경우

  • 이상교화국과의 정치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정신전자공학국에서 일부 인원이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나 조기에 적발된다. 이 여파는 다방면으로 번져나가 정치적 위기를 촉발하였고, 쿠데타 관련자를 비롯한 적지 않은 북한 고위직 인원이 동시 탈북을 결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민간에는 황장엽이 대표격으로 알려졌다).

    탈북 사건은 이를 이용하여 초상분야 재조정을 꾀하던 김영삼 정부와, 그들을 처단하려고 남파작전에 나선 이상교화국, 그리고 이들 모두를 통제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하고자 한 한국사령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 혼란 정국은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여력이 없어진 한국 정부가 피어슨 체제에 복귀하면서 예상 밖으로 싱겁게 종결되었으나, 이후 교화국 남파요원 검거를 위탁받은 한국사령부가 이를 대대적인 국내 변칙문제 재조사 및 회수 작전으로 확대시키면서 큰 파장을 낳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피어슨 체제 수립 후 애매하게 방치되었던 국내 소규모 요주의 단체들의 사례이다. 예로 광흥전자는 IMF와 재단 수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불건전 기업으로 추락했으며, 중정10국 폐지 당시 민간으로 도피했던 자립농업협동조합(舊농업기술연구소 변칙농업연구파트, 現두레원)도 소장 중이던 변칙개체를 다수 압류당하게 된다.


2012년-2017년


변칙현상의 급증, 요주의 단체 관련 교전행위 등 복합적인 위기가 한국사령부를 덮치다.

1) BE 제2차 삼각분쟁 스토리라인의 경우

  • 2012년 발발한 제2차 삼각분쟁으로 재단과 BE, GOC가 상호 선전포고하게 된다. 세계 각지의 재단 시설과 부대가 공격에 투입되거나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한국사령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분쟁 막바지에 재단과 GOC는 신뢰관계를 가까스로 회복하지만 이미 세 단체 모두 상당한 출혈을 강요당한 후였다.

2) 능구렁이 손 vs GOC 격돌 스토리라인의 경우

  • 2013년, 한국에서 뱀의 손 활동이 갈수록 확대되는 것을 불안요소로 여기던 세계오컬트연합 극동부문이 끝내 한국에 타격조를 침투시켜 대대적인 교전을 벌인다. 능구렁이 손은 가까스로 도주하지만 일부 주요멤버를 잃는 등 피해를 입었고, GOC는 재단이 방치하던 위험분자 단체를 요격함에 따라 한국 초상계에서 발언권이 강화된다.

이 무렵 한반도는 변칙현상 발생이 더 빈번해지고 기타 GOI 활동이나 새로운 GOI의 출현도 두드러지는 등 초상질서 불안정화가 심화됐다. 이 무렵 한국사령부는 2012년 김정회 이사관이 은퇴하고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Grace "Noraemine" Choi 관리이사관 휘하에 놓였는데, 사령부의 기존 관리역량을 넘어서는 양의 임무를 마주해야 했던 노래마인 이사관은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큰 줄기의 위협은 안전하게 관리되었지만 새롭게 대두한 모든 도전들이 잘 관리된 것은 아니었다.


2017년-2020년


한국 정부, 독자적 초상역량 회복을 꾀하며 외교전을 펼치다.

결론적으로 재단 한국사령부가 단독으로 한반도 초상문제를 모두 해결한다는 기존 체제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교전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면서 기존의 약속에 따라 재단에 적극적인 협력을 제공해온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재단에 요청하는 한편, GOC와도 접촉하여 협력을 모색하는 등 한반도 초상안보의 판을 새롭게 고쳐나가려 시도한다.


재단, GOC,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초상문제를 재론하다. 12·5 공동성명이 발효하다.

합의 내용에 따라 피어슨 각서가 개정되어 대한민국 정부 산하에 국가초상방재원(2018-)이 설립되고, GOC가 정식으로 대한민국에서 활동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