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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 내 이름은 玻璃内 栄土, 하리우치 에이도라고 읽는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이다.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태어나 20년 평생 일본을 벗어나본 적도 없던 평범한 도시 청년이다. 그 말대로 사람들은 다들 날 보고 "넌 참 평범하구나"라고들 했고, 나도 어릴 적엔 꽤나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발육도 보통, 가정형편도 보통, 성적도 보통, 학급에서 교우 관계도 보통이었으니까. 특이할 것도 없는 일이고, 당연히 앞으로도 그리 평범하게 살 줄 알았다.

이변을 깨달은 건 11살, 그러니까 소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놀랍게도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일본어 외의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영화도 항상 더빙되어 나오고 초등교육에선 외국어를 거의 전혀 다루지 않는 나라라곤 해도 상당히 드문 일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서 이제 곧 중학생이 될 테니 열심히 공부하라며 유명한 미국 영화를 원어판으로 구해다 틀어주신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영어를 들었다. 그랬을 터인데… 어째선지 난 영화의 대사를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막 때문에 착각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화면에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아무에게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겁먹은 채 하교한 후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외국어 자료를 찾아 들어봤지만, 마찬가지로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 중국어, 어떤 언어든 상관이 없었다. 내가 언어에 대해 뭔가 특별한 걸 타고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건 꽤나 이상한 느낌이다. 일본어로 들리는 건 아니다. 그냥 그 언어 그대로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외국어로 대화할 때의 느낌이 어떤지를 모르니 정확히 비교는 못하겠지만, 모든 언어가 그냥 모국어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아마 비슷할 것 같다. 몇 달 동안 남몰래 시행착오하며 알아낸 내 능력의 규칙은 대략 이렇다.

우선 지구상에 실존하면서 내가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언어만 된다. 픽션의 가상 언어는 불가능한 것 같고, 내가 존재를 모르는 언어를 먼저 말해낼 수는 없었다. 다만 이 '존재를 안다'는 건 엄청 널럴하게 먹힌다. 그 언어를 한 번 듣거나, 이름을 알거나, 심지어 그냥 그 언어가 있긴 있다는 걸 아는 정도로도 오케이. 참고로 방언도 된다.

어휘는 어떤 언어로 익히든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일본어로 'はさみ'라는 단어를 배워서 알고 있다면 한국어로 '가위', 영어로 'scissors' 등을 모두 알게 된다는 거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언어가 하나의 단어장을 공유한다는 감각이라 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물론 언어는 일대일로 간단하게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조금 더 복잡한 느낌이지만, 굳이 상세하게 해설을 늘어놓는 건 생략하겠다.

그리고 음성언어 해당된다. 문자, 제스처, 기타 비언어적 수단들은 전부 따로 익혀야 한다. 이 점에서 내가 일본인이라는 점은 은근히 큰 장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표음문자들은 알파벳만 익히면 머리 속에 짜여있는 언어체계에 딱딱 들어맞는 느낌으로 금방 익혀지는데, 한자같은 표어문자는 그렇지가 않으니 말이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말했지만, 한마디로 모든 언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러워할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세계화 시대에 이만큼 간단하면서 유용한 능력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좋은 능력인 건 맞다. 하지만 이 능력을 자각한 11살 꼬마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난 왜 남들과 다를까? 이제 영화처럼 정부나 나쁜 사람이 날 잡아가서 연구하는 걸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되기도 했으니 허튼 걱정은 아니었기도 하다.) 그래서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특별하다는 걸 철저히 숨기는 것이었고, 그렇게 내 사춘기가 시작됐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뭔가를 숨긴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수업시간에 외국어를 모르는 척, 배워가고 있는 척 하는 것도 물론 어려웠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나의 특별한 장점을 밝히지 않는 것 그 자체였다.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의 자아 인식만큼이나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하는데, 그 둘이 완전히 동떨어져버렸으니 자존감에 문제가 생기는 건 뻔한 일인 것이다. 몇 달 정도 그렇게 속으로 앓고 난 뒤 나는 더이상 이렇게 숨길 수 만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잡아떼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작전 변경이다. 조금씩 실력을 드러내면서 "영어 잘하는 아이" 정도로 자리잡고 나면 외국어를 얼추 막 잘해도 재능이 있으려니 하고 넘길 거라는 발상이었다. 그때부터 난 영어 시간의 주인공이 됐다. 질문에 곧잘 대답하고, 단어 퀴즈도 척척 맞혔다. 선생님께 칭찬받는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급우들의 선망 담긴 시선도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내가 템포 조절을 잘못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건 히가시하라 중학교에 어학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구 전체에 쫙 퍼졌을 때 쯤이었다. 지역신문의 집요한 취재 요청을 끝끝내 거부하신 부모님이 밤늦게 이 기묘한 아들내미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진지하게 의논하시는 걸 몰래 문 너머로 훔쳐들으며 심장을 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이 일을 겪고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내 능력을 밝혀버리지 않는 한, 영어를 잘하는 건 의심을 살 일이 아니라 대단하고 좋은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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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있어라, 도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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