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탑에서 단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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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늘 똑같이 꾸는 꿈이 있다. 자다가 갑자기 따사로워져 눈을 뜨면 그녀가 눈앞에 있다. 마치 연인과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에 서로가 몇 시간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내가 왜 이 새끼랑 연인이지라는 생각이 들면 로맨틱함이 가시고 공포가 들이친다. 변해가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눈빛을 그녀가 보면,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인다. 동시에 그녀가 앞으로 다가온다. 방금 느꼈던 불쾌감에 힘입어 크게 들어오는 그녀의 전진은 공포감을 주지만 레이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달음박질하는 심장소리만 들을 뿐. 하지만 악몽의 상상이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박동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에 심장이 있는 부위를 쥐고 뺨에 키스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서 보면, 침실의 벽에 언제나 레이나를 놀리는 낙서가 적혀있었다. 오늘 아침에 적힌 침실의 낙서는 이랬다.

‘Raina Petkoff?! Are you serious?'

그 때가 되서야 그 망할 여자가 기억이 나는 것이었다.

“주서리!!!!!!!!!”


평상복으로 지나가는 레이나를 모두가 흘끗 쳐다봤지만, 비번인 사람의 복장이야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레이나가 저렇게까지 씩씩거리면서 가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기도 했다. 플러그소프트의 서버장이라는 양반이 또 레이나의 방에 낙서를 남겨놨으리라.

저 당당하게 해결하러 가는 모습에서 보이듯, 이번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레이나가 작전 중에 강제 송환된 이후로 계속 잊을 만하면 레이나의 방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었다.

재단 인원의 정보와 사는 방까지 뚫린 거야 애초에 신출귀몰한 집단이니 그렇다 칠 수 있다. 문제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당최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방 안을 락스 냄새로 도배를 해봐도 깨끗해진 벽이 옆과 대비되어 더 선명해지는 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에는 윗분의 윗분까지 결재를 맡고 토깽이를 빌려서야 겨우 지울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토깽이가 든 노트북을 벽에 달린 콘센트에 연결한 게 해법이었다. 플러그소프트의 기술이 서로 맞아서인지 낙서는 그대로 노트북으로 빨려들어갔다. 토깽이가 레이나 놀릴 용도로 메모장에 하나씩 저장에 둔 게 흠이지만.

레이나가 향하는 곳이 SCP-522-KO, 토깽이가 격리된 격리실이었다. 이런 사적인 일에는 이것저것 빡빡한 결재가 필요했지만, 두 자리 수 넘게 장난이 반복되자 기지 이사관까지 그려려니 하는 처지였다. 어차피 토깽이도 전주인 닮아서인지 계략을 꾸밀 마음씨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막힐 줄은 누가 알았을까.

토깽이의 격리실 앞에는 라피스와 라즐리가 무슨 일로 경비가 서있었다. 쌍둥이는 평소대로의 눈웃음을 보였지만 레이나가 들어가려고 하자 막아섰다.

“무슨 짓이야?”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아 레이나가 말했다. 라피스가 억울하게 겁에 질린 병사의 표정으로 대답했다.

“토깽… 아니 SCP-522-KO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지금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부대 연구원과 더불어서 특무이사관보 님이 관찰 중입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라즐리가 거들었다. 레이나는 방금 담아두었던 짜증을 긴 한숨으로 뱉어내었다.

“서리가 또 내 침실에 들어왔어. 그래도 당장은 안 되는 거야? 토깽이 녀석, 나 놀릴 생각에 아파도 벌떡 일어날걸?”

쌍둥이의 표정이 사라졌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다 라피스가 재빠르게 격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나도 달라진 기류를 읽고 반대편 벽에 기대섰다. 레이나가 부대에 합류한 이래로 가장 어색한 침묵에 복도에 흘렀다.

이윽고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시랍니다, 이 한 마디가 오늘 쌍둥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토깽이 정도면 이 기지에서 유쾌한 SCP에 속하지만, 아무래도 표준 격리실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다섯 평짜리 관제실에는 감마-01 연구원 네 명과 특무부대장, 특무이사관보 한 분, 총 여섯 명이 있었다. 한 쪽 벽에 달린 강화유리 너머로 관제실보단 넓은 격리실이 보였다. 안에는 탁자가, 탁자 위에는 노트북이, 노트북 화면에는 얼룩무늬 토끼가 보였다.

라피스의 말대로 토깽이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벽 시간대의 TV처럼 지지직거린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눈부분이 X자가 되고 체온계를 물고 축 늘어진 화면이었다.

“저것도 몸 아픈 걸로 칩니까? 제 병가도 저렇게 넓게 쳐줬으면 얼마나 좋아.”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즐긴다는 게 좋은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아프다는 건 대부분의 성능도 저하되었다는 거지. 어제 저녁에 갑자기 노트북에 빨려들고서는 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어. 아바타도 저 형태로 고정되었고. 마치 어떤 힘 때문에 노트북 안에 갇힌 것 같다고 할까.”

부대장이 말했다.

“문제의 심각성은요?”

“일반적인 생각보다 온라인에서는 보안에 있어서 취약성이 높은 편이죠. 특히 상대가 플러그소프트인 경우에는 더욱이요. 플러그소프트랑 연결도 같이 하는 만큼 노트북으로의 연결은 더더욱 취약해요. 애초에 제가 이 상태가 된 데에 플러그소프트의 농간이 있을지도 모르죠.”

스피커로 너머로 골골되는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서 이 심각한 상황에 절 들여보낸 이유는 뭡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SCP-522-KO는 어젯밤부터 이 상태였네. 그리고 어젯밤에 또 자네의 방에 낙서가 그려졌지. 그렇다면 자네도 거기에 연관성이 있다는 거겠지. 평소처럼 자네를 찾아오고 SCP-522-KO를 가뒀다면, 자네보고 저 토끼와 접촉해보라는 플러그소프트의 메시지일지도 몰라. 시도할만한 가치는 있지.”

문장섭 특무이사관보의 말에 레이나는 방 안을 쭉 둘러보다가 말했다.

“누구를 보내기는 해야 하는데 애매한 상황이라는 거군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적절한 명분이 생긴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 거고.”

“아니, 꼭 그러진 않아. 어차피 널 보내려고 했거든. 플러그소프트가 쉽게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바로 너지. 오늘 비번이라 내일 부르려고 했을 뿐이야. 내일 안에 정상화되면 그거 나름대로 좋고.”

“그럼 내일 하죠.”

“서리 낙서 있는 방에서 자게?”

“씨발.”

“가서 전투복이나 입고 오게.”


간단한 방탄복만으로 무장한 레이나가 노트북에 다가갔다. 노트북 화면에는 토깽이 대신 비밀번호 입력창이 나타나 커서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레이나를 포함한 격리실 내 모두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바타가 있는 창이 없어지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살려줘요. 토끼가 비밀번호 뒤에 갇혔어요.”

토깽이의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레이나는 정말 이대로 진행하냐고 묻는 표정으로 강화유리를 쳐다봤다. 별 다른 지시가 없었다. 하긴 노트북 오래 켜두면 잠금으로 전환되는 게 당연하기는 했다. 그래도 짜증은 나는지라 레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 자판에 손을 얹었다.

차마 그게 함정인 줄은 노트북 속의 토깽이도 알지 못했다.

노트북 액정이 불룩해지더니 밖으로 터졌다. 모니터 한 쪽으로 무한한 공간이 펼쳐졌다. 격리실 안의 모두가 인식할 수 없었던 색채가 무한해진 너머에서 쏟아져 나왔다. 레이나의 몸이 뻣뻣해졌다. 가장자리로 뻗어나간 광선의 끝이 손처럼 갈라졌다. 손끝이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머리 뒤에 달린 스위치를 끈 듯이 레이나는 의식을 잃었다.

색채가 격리실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지자, 격리실 안에는 다 나았다고 춤을 추는 토깽이만이 있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청각이었다. 온 공간에서 울리는 관능적인 신음소리가 레이나의 귀를 때렸다. 시각도 돌아왔나 싶지만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욕구 해소용 비디오에서 들은 종류의 소리였다. 레이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도대체 어떤 지옥에 떨어진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갑작스런 질문에 레이나는 바보같이 눈을 떠버렸다.

탁 트인 넓은 밀실, 야하다는 말로 대체 가능한 화려한 조명. 여기는 타락한 이의 천국이요, 생이란 것이 넘치는 지옥이었다. 신음소리의 출원지인 양 눈끝의 엉켜있는 모습이 시각적인 충격으로 좁아지는 시야에 가려졌다. 두 눈 사이에는 황금빛 기둥들이 모여있었다. 교성들 사이에서 확연한 비명이 거기에서 들려왔다. 기둥 주변에는 이종의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갑자기 기둥이 열리고, 후련해보이는 피투성이가 나왔다. 주변의 사람들은 다음 기회를 잡으려고 기둥에 들어가려 하다가 자기들끼리 엉켰다. 눈이 닿는 곳 하나하나가 쾌락의 뒤틀린 땅이었다.

레이나는 타오르는 자극과 정보량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벌려진 입으로 침이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침 떨어지는 소리에 미친 인간들이 반응할까봐 다급하게 손으로 훔쳤지만, 중심이 더 망가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한 소리가 나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쓰러지는 레이나를 받쳐주었다. 레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의 헐벗은 상의 위쪽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능글맞은 표정까지 분명 익숙했지만, 이미 퓨즈가 나간 머리는 빨리 처리가 되지 않았다. 기어코 누군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망할 웃음이 내려오고 있었다.

“주서리이잇…읍!”

둘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레이나의 이성을 붙잡던 끈마저도 끊어지면서 레이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익숙지 않은 벽이다. 도대체 무슨 센스로 얼룩말 무늬의 벽지를 발랐나 싶었다. 미세한 그림자의 변화로 창살이라는 것이 뇌에 인식되었다. 그 사이로 들이밀고 있는 익숙한 사람의 얼굴까지도.

서리의 옷차림은 아까보단 몸을 더 많이 감싸고 있었다. 창살에 바짝 붙어 역광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확 달아오른 귀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똑바로 보였다. 어이없게도 귀엽게 느껴져 레이나는 누운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겨?”

“너도 부끄럼을 타는 인간이구나 싶어서. 혹시 첫 키스?”

대답이 없었다.

“진짜 첫 키스구나 미안.”

“그것보다는 갑작스럽게 하게 되가지고 당황스러운 거거든! 나 아니었으면 거기에 썩어 죽었을 거면서!”

레이나는 일어나 앉았다. 입술 뺏긴 거를 문제 삼을 때가 아니었다. 갇혀있는 지금의 주도권은 서리에게 있었다. 마침 서리의 말도 심상치 않았으니 당장은 저쪽이 마음대로 나불거리게 하는 편이 나았다. 레이나의 역할은 그 물꼬를 터서 술술 푸는 정보를 듣는 일 뿐이었다.

“답지 않게 말을 살벌하게 하네. 내가 거기의 일부라도 될 뻔했던 거야?”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지.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있거든. 너의 앙칼진 성향이면 분명 저놈들의 변태적인 취향을 자극하게 될 테고! 관심이 끌리기 전에 더 강한 자극을 추가해서 기절시키고 끌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런 데로 날 끌고 온 거야? 이런 곳에 있는 걸 보니 너도 역시…”

레이나는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삼켰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그나마 덜 변태적인 여자하고만 노는 척 하면서 너 올 일만 기다렸거든!”

불안한 듯 떨리는 미소는 애써 참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만큼은 레이나라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목적이 아니야! 나와 함께 싸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넌 내가 아는 사람 최고의 전사니까 데려오려 했을 뿐이라고. 형식상 덫을 쳐 놓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걸릴 줄은 몰랐어.”

서리가 창살에서 물러나서 팔짱을 끼고 레이나를 쳐다봤다. 조명 아래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도 서리 얼굴에 남은 무표정에 모두 거두어졌다. 그제야 레이나는 처음부터 물었어야 했던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인데?”


‘쌓아쌓아 빌딩빌딩’의 베타테스트는 촌스러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플러그소프트 설립 초기에 실시되었다. 그 때는 한 행성을 통째로 사들여서 테스트용 부지로 사용하기가 어려웠기에 주인이 없는 외진 행성을 하나 골라 사용하였다. 이후 엔딩까지 모든 시뮬레이션을 마친 서리는, 무단 점거 행위에 대한 책임 회피와 동시에 본인의 귀차니즘에 따른 선택으로 이 베타테스트용 행성을 방치하고 기록에서 묻어버렸다.

창조주에게 버려진 빌딩의 거주민들은 자기 나름대로 발전해나갔다. 한정된 자원을 복사하거나 재생산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서리가 이들에게 빌딩 ‘밖’이라는 개념을 지웠기에 애먼 데에 힘쓸 일도 없었다. 지구보다 훨씬 작은 빌딩 안은 복작복작한 지구의 발전상을 닮아갔다. 오히려 그 축소판이었기에 사회상은 지구보다 빨리 변해갔다. 이내 인구가 정체되고 잉여 산출량이 넘쳐나게 되었을 때, 생산 시설을 관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서로서로가 나태에 합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최하층에서 쥐어짜이는 다수들 위로 평생 놀고먹는 사회가 뿌리내려버렸다.

이들이 창조주에게 버림받았음을 깨달은 건 그 때였다. 동시에 쾌락과 과잉의 신이 그들에게 강림하였다.


“작은 사회망이 극도로 안정되자 상류층은 이내 본인들의 쾌락에 빠져버렸어. 그게 ‘지속 가능한 섹스’ 같은 거였으면 내가 말을 안 해. 하지만 쾌락은 그런 쪽으로 발전되지 않더라고. 조금 더 가학적으로, 조금 더 고통스럽게….. 이들의 생존을 보장해줬던 과학 기술은 이제 고문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어. 끝도 없는 이들의 쾌락 찾기에 상류층 사람들은 점점 뒤틀려졌지. 그리곤….. 내 코드에서 벗어난 존재로 거듭나버린 거야.”

“그래서 싹 쓸어버려야 한다?”

“내 의도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있으면 곤란해. 특히 얘들처럼 묻으려고 했던 존재면 더더욱.”

“그러면 게임을 끄면 되는 거 아니야?”

“여기가 지금 꺼진 게임이야.”

“응? 하지만…”

“내 말은 어디로 들은 거야? 내 코드를 벗어난 존재라고 했지. 게임을 끈다고 사라지는 존재를 넘어서버렸다는 거야. 자기 밑에 것들을 짜먹어서 얻은 효력이지.”

서리가 팔짱을 풀고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민들은 게임 종료하면서 바로 사라져줬어. 죽일 인원이 팍 줄었다는 말이지. 결국 최상층으로 올라가서 모두 죽여야 끝난다는 말은 똑같지만.”

레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하자면, 선을 넘은 게임을 처분하기 위해 고문 기술로 무장한 귀족들을 일일이 죽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단 둘이서.

레이나는 눈을 살짝 치켜떴다. 서리는 잠깐 얘기를 멈추고 공중에서 뭔가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토깽이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는 지하야. 아까 우주 변두리라고 얘기했지? 우리 얼룩이랑 신호가 닿는 곳은 네가 왔던 최상층뿐이야. 그러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딱 맞췄어?”

“그래.”

“어머, 유감이어라.”

서리가 공중에서 열쇠를 꺼내 창살문을 열었다. 레이나가 쭈뼛거리며 밖에 나가자 서리가 손을 잡아끌고 등에 밀면서 은근슬쩍 레이나에게서 압수한 무기를 찔러 넣고 발랄하게 레이나를 이끌었다.

“늦장 부리지 말고 바로 가자. 엘리베이터를 적극적으로 쓸 수 없다는 거 빼고는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손바닥에 그러모아 감기는 무딘 총의 감촉. 거부감이 밀려온다.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 총구를 적에게 향한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방아쇠에 올리고 살짝 꼬집듯이 손가락을 당긴다. 명중했다면, 남은 것은 쏜 사람과 그 사람 안에 남은 반동뿐이다. 다만 그 뿐이다.

7500층에서 9000층의 병력을 모조리 소탕하고 남은 데이터 시체 위에서 레이나는 잠깐 휴식을 취했다. 서리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다. 상류층들은 자신들의 주거 구역을 넘어 다른 지역에서까지 세력권을 만들어내어 가져갔고, 그 결과 한 명이 몇 백 개가 넘는 층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훅 낮아진 밀도에서 생명신호로 감지되는 타겟만 추적해서 제거해버리면 끝이었다. 그들 손으로 개조된 경비 및 경호 병력들이 문제였지만, 개발자와 베테랑 게이머 앞에서 그 정도쯤이야 부케로 저티어에서 노는 정도였다.

이번 층의 지배자는 제비뽑기에 따라 서리가 처리하기로 했다. 서리는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소방도끼로 문을 부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이나는 웃음소리인지 비명소리인지 모를 누군가의 소리를 들으며 살랑거리며 들어가는 서리의 뒷모습을 보았다.

권총을 너무 많이 꼬집었는지 손가락이 살짝 아파왔다. 누구보다 차가운 시체산에 몸을 기대며 레이나는 잠시 손가락을 풀어줬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모두들 회색 표정에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생겨날 뻔했던 죄책감이 들어갔다. 현장 요원으로 변경되었을 때 권총을 쏘는데도 오래 걸린 걸 생각해보면 참 장족의 발전이다.

순간 시체산이 큐브 모양으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뒤로 넘어진 레이나가 권총을 손에 쥐고 고개를 들었다. 서리가 스피커 모양의 총을 들고 평소대로의 장난끼 넘치는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저희 플러그소프트는 유저 분들의 원활한 게임 이용을 위해, 죽은 유닛들은 모두 삭제처리를 한답니다!”

그리고 그대로 누워있는 레이나를 덮치려고 할 때에 레이나는 발로 서리를 밀치고 일어났다. 서리는 굴하지 않고 레이나와 찰싹 달라붙어서 다음 구역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밀어내기도 귀찮아서 그냥 둘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거 구역은 어째 패턴이 다 반복되네, 재미없게.”

“그러게. 초반 어업 구역에서 너무 임팩트가 컸던 거는 아니었을까 몰라.”

“좀 압도되기는 했지. 이런 건물에서 해저 도시를 볼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덕분에 처리하기는 쉬웠지만. 폭탄 하나에 모조리 수몰되어 버렸지.”

“그 때 쾌감도 장난 아니었지.”

절그럭.

“그래도 슬슬 구역이 요새화 될 테니까 여기서부턴 강력한 걸로 가자. 이거 하나 줄게.”

정적.

“안 받을 거야?”

서리가 돌격소총을 들고 말했다. 레이나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서리를 스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서리는 아직 멀은 건가 하는 미소로 다른 손에 탄창을 생성해 장전했다. 대신 레이나에게 줄 휴대용 바주카포를 인벤토리에서 검색하던 중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퓻.

이질적인 소리에 서리는 고개를 들었다. 목을 잡고 쓰러지는 레이나, 그 너머로 엘리베이터 안에 온통 검게 차려입은 사람이 보였다.

고함을 지르려고 하기도 전에 서리는 소총을 조준하려고 했다. 동시에 목 쪽에서 격통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쓰러가던 와중에 서리는 레이나에게 가려졌던 형체의 손에 들린 테이저 건이 보였다.

형체가 레이나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서리는 그 자리에서 눈이 감겼다.


인간의 정신력은 어느 정도인 것 같나.

이명 때문에 사람이 말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레이나는 풀린 눈으로 앞에서 전선을 정리하는 사람을 보고만 있었다. 잔뜩 흐려진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이나의 예상이 맞다면 흔히들 미친 과학자하면 생각나는 인상이었다.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팔다리는 의자에 묶여있었다. 머리 위로 이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눈이 마음대로 안 돌아가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가 쓰러지지 않으니 머리를 덮을 정도로 크고 단단히 고정된 물체까지는 분명했다.

가학적인 쾌락과 피학적인 쾌락, 육체끼리의 교접을 통한 쾌락은 우리가 너무 통달해 버렸다. 이제는 정신적인 폭력에 집착을 할 차례지. “하지만 이미 육체적 쾌락의 극단에 달한 이들은 인형이나 다름이 없었어. 그러니까 당신은 꽤나 귀한 피험체로군.”

레이나의 초점이 맞춰졌다. 낯선 이의 외형은 레이나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정신 차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반격하는 것이었다.

“눈이 말끔해졌군”

젠장. 생각한지 얼마나 됐다고.

“아주 좋아. 그 편이 훨씬 재밌고 황홀할 테니까. 벌써 깨어난 걸 보니 당신의 정신력이 기대가 되는군. 과연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치는지, 얼마나 잘 버티는지가 보고 싶어. 아무리 좋은 실험 결과여도 지금 같은 순간의 기대감을 뛰어 넘을 순 없단 말이야. 물론 그대로 무너져버려도 매우 만족스럽긴 하지. 그 이후는 맨 위층 놈들 손아귀라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 많았군. 결론은 당신의 정신적 약점을 뚫려 농락당하다가 정신을 놔버리는 순간이 내게는 큰 기쁨이라는 거야.”

기분 나쁜 웃음소리. 의자 위에서 버둥거리면서 듣기에는 너무나도 기분이 나빴다.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화가 났다. 두려움을 지우려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그리곤 그런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앞의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자는 기계 위에 두드러져 보이는 크고 빨간 레버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도 더 즐겁게 해주라고.”

레버가 아래로 내려지고, 레이나의 홍채는 위로 올라갔다. 뒤로 돌아간 눈동자의 시야는 검은 어둠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뇌를 헤집는 짜릿한 신호가 온몸을 꿰뚫고, 그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어두운 시야에서는 바보 같던 날을 비추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아빠?”

“괜찮아, 레이첼. 그보다는 완벽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구나.”

지금 보니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어린 레이첼이었던 레이나의 자세는 일평생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감탄할 만큼 완벽했다. 레이나도 산탄총을 주로 드는 대원들을 봐왔기에 아버지가 보는 만큼 잘 보였다. 어깨에 딱 맞는 개머리판, 방아쇠에 닿을 듯 말 듯한 오른손가락과 정확한 균형을 위한 자리를 잡은 왼손. 그걸 바탕으로 흔들림이 없는 총구와 그 사선 끝에는 사슴의 머리가 있었다.

레이나는 이 날을 기억한다. 그 지독하도록 멍청했던 순간. 평생토록 양손으로 총을 못 쓰게 되었던 순간. 아이의 손에서 총을 치우려고 해봐도 손은 총을 통과하고 불을 뿜은 탄환도 레이나의 몸을 통과했다. 사슴의 목이 여러 발의 탄환에 갈갈이 찢어졌다.

아버지는 바로 뛰어들었고, 어린 레이첼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레이나를 그냥 지나갔다.

“아빠…… 죽었어요…..?”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죽을 거야. 이리 와서 위로해주렴.”

레이나는 아이를 막으려고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는 아무것도 닿지 않고 땅에 엎어질 뿐이었다. 덕분에 다음 일어날 비극을 가장 비극적인 자세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불쌍해요 아빠…”

“괜찮단다, 레이첼. 그만큼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리 와서 도와주렴. 편하게 보내줘야지.”

그리고 아버지는 몸을 돌릴 것이다. 그리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완벽한 사격의 주인공을 볼 것이다.

“레이첼! 총구는 쏠 때 빼고 하늘과 땅…”

어린 레이첼은 방금 사격으로 어벙벙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호통에 더욱 놀랐을 것이다. 아버지가 못 본 실수는 하나 더 있었다. 방아쇠에는 여전히 오른손가락이 있었다.

총구는 그렇게 불을 뿜고 총탄은 다른 살을 찢을 것이다.

의식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무의식은 지워내지 못한 사고. 사격에 재능이 있었던 소녀는 이후에 양손으로 총을 잡지 못했다.

총성이 기나길게 이어진다. 모든 게 일그러진다. 어린 레이첼의 비명과 쏟아지는 눈물이, 그리고 다 커버린 레이첼의 허리춤에 달린 권총의 무게가 레이나를 짓누른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어딘가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과거에서 뜯겨나가진 레이나는 처음과 똑같은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다시 빨려들어갔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아빠?”

“괜찮아, 레이첼. 그보다는 완벽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구나.”

레이나는 본능적으로 총구를 비틀고 싶어 손을 휘둘렀다. 총구를 뚫어버린 손아귀가 어린 레이첼의 머리를 지나갔을 때에 레이나는 이번이 다섯 번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엇도 바꿀 수 없는, 똑같이 반복되는 절망의 늪에서 레이나는 세 번째로 비명을 질렀다.


영겁의 어느 순간에 주변에 뿌옇게 김이 끼었다. 이것이 기계에서 나는 것인지 레이나의 머리에서 나오는 건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부디 과부화가 됐으면 할 뿐이었다.

희뿌연 김 너머로 작고 발랄한 모양새가 보였다. 손에 들린 기다란 무언가에서 어떤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피투성이의 무대 위에서 막 내려왔던 레이나에겐 걸쭉한 모든 액체가 피로만 보였다.

그리곤 형체가 조금 다가와서 보니 정말로 피가 맞았다. 서리가 피가 범벅인 기다란 대검을 들고 레이나에게 다가왔다. 서리가 갈라놓은 연기 사이로 잔뜩 난도질당한 아까의 미친 과학자와 보였다. 산산조각난 계기판과 머리를 덮고 있던 커다란 기계의 잔해 마찬가지였다. 서리의 얼굴은 광기와 환희가 가득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광기에서 막 환희로 넘어가는 표정이었다.

묵직한 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나의 양 볼에 서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은 걸 확인하고 싶었는지 손길은 온 몸으로 이어졌다. 약간은 사심을 챙기려는 목적도 있었을지도. 몸을 확인한 서리는 다시 볼부터 시작해서 레이나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나의 초점은 맞춰졌지만 확연히 눈은 풀려 있었다. 환희로 가득했던 표정에 다시 약간의 광기가 미소로 살짝 비져나왔다.

레이나의 뺨이 강하게 잡혔다. 머리가 앞으로 잡아당겨짐과 동시에 서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급하게 깨어나기 전에 레이나가 느낀 것은 너무나도 단편적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 안쪽으로 느껴지는 피비린내 맛. 그 틈새에 파고드는 어떤 혀. 서로 얽히고설킨. 커지는 동공.

서리는 그냥 행복했다.


레이나가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해서 둘은 이 층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주거구역에는 모다불을 위한 목재들이 충분했다. 항성 없는 행성이라 충분히 어두운 이곳은 전등을 끄기만 해도 심야 느낌이 났다.

누워서 안정 중인 레이나의 옆에는 서리가 붙어있었다. 레이나는 떨쳐낼 힘도 없어서 그저 같이만 있었다. 따뜻한 기운에 물러서기도 쉽지가 않았다.

“잠자리에서 옆자리 온기를 느낀 지 얼마나 됐어, 레이나?”

“으응? 좀 오래되긴 했지. 내 맘을 읽기라도 했어?”

“흐응, 나한테서 온기를 느끼긴 하는 거야? 난 이제 레이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네!”

레이나의 당황한 말을 서리는 틈을 주지 않고 막아서 이어나갔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늘 고생이 많아 레이나.”

“그 기계, 내 머릿속도 보이는 거야?”

“그러진 않아.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있을 거라 생각해? 그 기계는 사람의 본연의 트라우마를 계속 자극해서 붕괴시키는 게 목적인 기계야. 너에게 가장 트라우마라고 한다면 역시 그런 일이니까.”

“넌 어떻게 괜찮았나보다.”

“난 트라우마가 없어. 소중한 사람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흠, 지금 처음으로 잃을지도 모르겠어…”

서리는 말끝을 흐렸다. 날카로워졌던 레이나의 말도 누그러졌다.

“레이나.”

“응?”

“난 네게 소중한 사람이 됐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지금은 소중한 사람의 곁에 늘 있을 수 있어. 좋은 기회가 된 거야 레이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아가자.”

서리는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누그러진 레이나도 한발짝 더 받아주었다.

“그냥 여기에서만, 날 위해 무기를 들어줘, 레이첼.”

“좀 있으면 사랑한단 말도 하겠다.”

“사랑해.”

레이나의 어안이 벙벙한 눈을 보며 서리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은 그것보다 더 길게 찢어졌다. 분명 얼굴은 농담을 말하는 표정이지만 말하는 내용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사랑해, 레이첼 베아트리스 쇼.”

정적.

“자자.”

레이나의 한 마디에 오늘의 대화는 멈추었다. 하지만 그 여운은 모닥불이 꺼질 때까지 남아있었기에 레이나는 이제는 단단히 포옹하고 있는 서리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탑 시간으로 이틀 뒤.

탑 최상층은 아래층의 난리에 비해 평화로웠다. 너무나도 저급해져버린 이들은 자신들의 요새에 두 사람이 갈려버렸다는 이른 확신에 남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 비해 자기들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은 자각조차 못한 채였다.

그렇기에 최상층의 유일한 입구에서 굉음이 났을 때, 사람들은 대응할 생각도 하지 않고 패닉에 따져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만 했다.

마침내 레이나의 대검이 문을 조각내다시피 박살내었다. 돌격소총 대신 서리와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것이 학살의 초입을 여는 것을 서리는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며 총을 장전했다.

비명과 피와 다른 인간의 내용물들이 기둥과 창문에 흩뿌려졌다. 레이나와 서리를 지금까지 위협하고 귀찮게 했던 것에 충분한 대가였다.


황금 기둥 속에 있는 남자의 목이 레이나가 죽인 마지막 주민이었다.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 통로에 끼어있었다. 도망을 치려다 못 친 건지, 누군가의 악랄한 고문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레이나는 마침내 그에게 안식을 줄 뿐이었다.

서리는 데이터 시체산에 몸을 기대어 단검을 지휘하듯 흔들고 있었다. 수많은 살인 끝에 오는 아드레날린과 허탈감을 채우려는 행동일 것이다. 무엇보다 앓던 이가 빠진 느낌도 들 테고 말이다.

레이나는 서리 맞은편에 앉아 무릎을 세워 양팔로 감쌌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고 오는 일종의 무게감을 함께 감당해나갔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내 침묵을 깨고 레이나가 말했다.

“이제 최상층이니 토깽이하고도 신호가 닿겠네.”

“너희는 얼룩이를 토깽이라고 불러? 암튼 그렇겠지. 셧다운해서 시간도 멈췄으니까. 아마 너희 쪽에서는 사라지자마자 한 0.5초 끊기고 신호가 재연결됐을 거야. 구조대 조직한다고 뭐하고 하면은 그래도 30분은 걸리려나?”

“2시간은 족히 걸릴걸. 빌어먹을 관료제.”

“동감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거 같네.”

저 멀리서 무지갯빛 빛줄기가 유리창을 향해서 똑바르게 날아왔다. 레이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서리의 말뜻을 이해하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서리도 마찬가지로 일어났지만 레이나와는 다르게 여유롭게 일어나 옷에 묻은 피딱지를 털었다.

이윽고 빛줄기는 유리창을 박살내었다. 한 순간 엄청난 돌풍이 불었지만, 빛이 틈을 메꾸면서 이내 잠잠해졌다. 통로가 잠잠해지자 동시에 아까보다는 덜 눈부신 섬광과 함께 중무장한 요원 5명이 나타났다. 모두들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밭이라는 게 흠이었지만.

요원들은 잠시 주변의 시체들과 레이나를 차례차례 조준하더니 머쓱하게 고글을 벗었다. 레이나는 한 사람의 팔이 기계팔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여긴 나흘이나 흘렀다고.”

“엣, 아니, 그. 나흘 동안이나 이 난장판을 만드신 거예요? 혼자서, 아니 둘이서?”

라피스의 목소리에 서리가 대신 대답했다.

“아뇨, 1층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나흘이랍니다. 안녕하세요, 플러그소프트 제1서버장 주서리라고 해요!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죠?”

저 대책 없는 당당함에 라피스가 당황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라즐리가 기계팔로 등을 좀 두드려 줘서야 겨우 레이나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 정리되지 않은 게 너무 많은데요. 피곤해보이시는 얼굴도 그렇고. 피칠갑이신 두 분도 그렇고. 그 중 한 분이 플러그소프트 서버장이신 것도 그렇고. 지금 대장이 들고 계시는 칼까지 해서… 흠… 어느 거부터 대답하고 싶으세요?”

“아무것도. 일단 가서 좀 쉬고 싶다. 면담도 해야되니깐. 다 끝나고 내 무용담을 얘기해줄게. 그것보다 윗분들이 많이 화나셨어?”

“솔직히 대장이 이렇게 엮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특무이사관보님도 거기에 계신데다 우리 이사관님이 그렇게까지 화내시는 분은 아니잖아요. 신호도 바로 잡히고 구조 임무도 어쨌든 성공인거 같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

“근데 대장 면담 강도는 좀 세질 거 같은데요.”

“씨발.”

레이나는 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리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얼굴로 둘의 대화를 재밌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나는 다 끝나고 긴장이 풀린 김에 일상적으로 말을 걸었다.

“너 때문이란다.”

“핫, 하! 내 존재감이 이렇게 커서야 못 쓰겠네. 어떻게 체포라도 해 갈려고?”

“됐다. 성급하게 싸워서 뭐하겠냐. 멍청한 짓해서 잃은 건 우리 애 팔 하나로 충분해.”

“넌 좋은 대장이야 레이나.”

레이나는 픽 웃었다. ‘레이첼’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리에게 있어 공은 어디까지고 사는 어디까지인건지. 아니면 괜히 자기랑 더욱 엮일까봐 배려를 해주는 건지. 이미 충분히 엮이고 있다는 건 본인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이런 생각에 레이나는 살짝 도발하는 본새를 섞어가며 대화를 조금 더 걸어보았다.

“칼은 어떡해? 돌려줄까?”

“음… 퀘스트를 깼으니까, 보상을 줘야지! 그냥 가지고 가! 좋은 연구 주제를 내가 던져줬네.”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재미없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이라, 흠, 그래, 그 때도 적으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납치하는 일은 자제해주고. 토깽이도 그만 괴롭히고.”

“그래, 그래, 너 나 지금 불편하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뒤에 다섯 사람이 지금 나랑 너 노려보고 있거든.”

“내가 너보다 더 심각하거든. 그리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너한테 장난쳐보겠냐? 깔끔하게 악수 한 번 하고 헤어지자.”

레이나는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서리는 잠깐 뾰로통해지더니 한 쪽 암워머를 벗고 악수했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어.” 레이나가 작게 말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평소랑 다르게 행동하기만 해봐. 재미없게.” 서리도 똑같은 크기로 대답했다.


마침내 모두가 레이나를 앞세워 떠날 때였다. 막 빛줄기로 발을 들이려던 레이나는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레이나!”

서리가 손을 흔들면서 손나팔을 입에 들고 소리쳤다.

“어젯밤은 정말 환상적이었어!”

“주서리 이 쌍ㄴ-”

레이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동시에 욕지거리를 퍼부으려 했지만 반사적으로 빛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든 눈부심이 지나고 익숙한 천장이 보였을 때, 레이나는 보안 요원이 올 10초 안에 어떻게 모두를 입막음 시킬지 고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