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의 엄마는 노래를 잘 했다고 했다. 카나리아 본인은 가수인지 성악가인지 모르겠다 했지만, 나중에 기록을 보니 성악가로 나왔다. 사실 신문에 대서특필된 인물이기도 하기에 누군가는 카나리아의 성을 알기도 했다. 이런 인지도는 카나리아가 재단에 올 때 잠깐 발목을 잡았었다. 하지만 동시에 카나리아에게 준 그 사건 덕에 재단에 들어올 실력을 얻었다.
카나리아가 10살 때였다. 카나리아의 부모님은 딸의 나이가 두 자리 수가 된 것을 기념하여 여행을 떠났다. 카나리아 손에는 기르던 새 (그 새도 카나리아였다)가 사는 새장이 들려있었다. 평범한 가족 여행이었다. 마지막 날 전까진.
그 날 밤, 생각보다 오래 달린 차는 길가에 퍼져버렸다. 카나리아의 가족들은 묵으려던 호텔 대신 더 가깝고 낡은 숙박업소 에 들어갔다. 침대가 부족했기에 부모님은 장롱 안에 카나리아의 이부자리를 펴줬다. 카나리아는 불평하지 않았다. 10살이면 성숙해져야한다는 생각이 있기도 했고, 새장을 안고 잘 수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무언가 부족하지만 내심 즐거워 보이는 여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누군가에겐 인생 마지막이기도 했지만.
고함소리. 의문의 열기. 비명소리. 카나리아 가족은 모두 일어났다. 카나리아는 장롱 밖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문을 막고 빗장까지 질러버렸다. 어머니는 이제 카나리아의 비명을 달래야했다.
아버지는 창문을 내다봤다. 십자가인지 뭔지 모를 조잡한 나무 판자가 주차장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 앞으로 복면을 쓰고 도끼를 든 인간들이 비척거리며 호텔로 향했다. 몇몇은 아래층에서 머리가 갈라진 시체를 들고 불구덩이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하라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 전에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이제 자기 쪽으로 올라오는 복면들을 보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로 창문에서 벗어나 문을 물건들로 막기 시작했다. 비명소리 가운데에서 마지막으로 침대를 세웠을 때, 문에서 격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지면서 물건들이 흔들렸고, 아버지는 그걸 몸으로 막았다. 어머니는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고 카나리아를 달랬다. 카나리아는 이 모든 광경을 장롱 틈 사이로 보았다.
모든 게 카나리아 눈에 새겨졌다.
가구가 무너지고 아버지를 덮쳤다. 그 위로 도끼들이 난무했다. 피의 호가 방 여기저기로 튀었다. 유난히 높은 어머니의 비명이 울렸다. 카나리아는 귀를 막을지 새장을 더 꼭 붙잡을지 고민했다. 순간 어머니의 비명이 멈췄다. 카나리아에게 뇌수인지 피인지 모를게 울쿡하며 튀었다. 카나리아의 생각이 돌아오기 전에 빗장이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갈라져 부서졌다. 복면을 쓴 인간 다섯명이 카나리아들을 내려다봤다. 그 중 유독 피가 신선해 보이는 한 명이 도끼를 들었다. 얼굴에 쓴 복면만큼 비인간적인 움직임이었다. 도끼가 머리 위로 번쩍 들렸다. 그러다 단호한 이별을 고하듯 담담하게 내리쳤다.
카나리아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가 얼굴에 튄 느낌. 그리고 등에 무언가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고통은 없었다. 카나리아는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새장 속 카나리아의 머리가 갈라져 있었다.
복면들은 느리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나리아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카나리아의 눈은 저들 복면의 눈구멍과 비슷해졌다. 보지만 보는 게 아니고, 듣지만 듣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의 생각이 점점 빠져나가 하얗게 되었다.
복면이 다시 천천히 도끼를 들었다. 카나리아 시체가 딸려 올라가다 새장에 걸려 떨어졌다. 도끼는 다시 머리 위로 높게 쳐들렸다.
단조로운 권총 소리가 들린건 그때였다. 경찰이 밀고 들어오며 5명을 향해 불을 뿜었다. 다섯 명 모두 쓰러졌다. 한 명은 카나리아를 향해서였다.
시체의 피가 카나리아에게 떨어졌다. 그러면서 새하얘진 카나리아의 정신에 붉은 점이 한두 개씩 찍혔다. 어떤 소리도 없이, 붉은 색과 흰 색만 남았다.
"히끅."
카나리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분노가 단순한 화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유란은 카나리아의 심리 보고서에 담길 첫 줄을 썼다가 지웠다. 보고서에 이런 어투는 별로 좋지 않았다.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는 내담자의 상태에 유란의 속이 복잡했다.
'차를 타두길 잘했군.'
유란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미지근한 차를 홀짝였다. 눈앞에는 빈 공간에 깜빡이는 커서가 보였다. 유란은 스크롤을 올렸다. 바로 위에 복사해둔 인터넷 신문 기사가 떴다. 사이비 신도들이 호텔에 쳐들어가 여자아이 한 명 빼고 모두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그 여자아이 하나가 이 보고서의 주인공이었다.
유란은 스크롤을 더 올렸다. 인사부에서 작성한 인원기록이 떴다. 카나리아의 경력은 화려했다. '특수부대'라는 단어가 이력 곳곳에 박혀있었다. 참여한 작전 목록은 이력보다 더 길었다. 유란은 잠깐 카나리아의 나이 가지고 셈해보다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셈했다. 잘못 계산하면 미성년자가 입대한 결과가 나왔다. 아래 기사에서 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막 10대가 된 소녀와 막 성인이 된 여자 사이의 간극이 이리 컸나, 하고 유란은 다시 생각했다.
유란은 스크롤을 더 올렸다. 이번엔 임무 보고서로, 가장 최근 부서진 신의 교단을 습격했을 때의 보고서였다. 지휘관은 카나리아였다. 원래는 그럴 수 없었다. 카나리아는 지시를 내릴 수 없으니까. 모두에게 수화를 익히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카나리아는 그런 건 필요없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눈치챘어야 했다고 간부 몇 명은 말했다. 팀원들은 보통 저격수 포지션이던 카나리아가 돌격소총을 들었을 때 알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카나리아의 말이 맞았다. 지시는 필요없었다. 카나리아는 도착하자마자 예고도 없이 작전지로 돌격했다. 모두가 말리려던 순간에 카나리사는 문을 부셨다. 모두가 겨우 지원을 갔을 땐 슬슬 시체로 언덕이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작전은 성공했다. 동시에 실패했다. 보고나 연구를 위해 남길 표본이 없었다. 다 박살이 났다. 이들이 임무를 끝내고 가져온 건 다량의 톱니바퀴 뿐이었다.
유란은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렸다. 여기는 면담기록이었다. 카나리아와 유란 사이에서 오간, 침묵과 손들의 면담. 카나리아는 대체로 담담했다. 아무리 봐도 막무가내로 돌격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카나리아의 반응은 격해졌다. 손이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화풀이 대상인 양 이리저리 흩뿌려졌다. 종래에는 그것도 부족했는지, 말을 하고 싶어도 옷하는 목을 잡고 켁켁거렸다. 유란은 카나리아의 입 안에서 마음으로 굳어버린 혀를 보았다.
면담은 다음과 같이 끝났다.
'저희는 의사소통을 위한 음성보조기구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왜 사용하지 않죠?'
'나 자신의 고삐를 늦추고 싶지 않아서.'
카나리아는 여기서 얘기를 멈추고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가만히 유란을 째려봤다. 약간의 눈물이 카나리아의 눈에서 비져나왔다. 유란은 면담이 여기까지임을 직감했다.
지금의 유란은 그랬던 과거의 유란을 떠올렸다. 커서는 면담의 마지막 부분에서 깜빡였다. 이 커서가 지운 내용에서처럼, 분노는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누군가는 화산처럼, 누군가는 설산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채찍처럼 나타난다. 카나리아는 채찍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모두를 없애버리려고 카나리아는 분노를 이용했다. 힘들면 카나리아의 머릿속은 용광로가 되어, 카나리아는 그 힘으로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승리 드라마로 보이지만, 카나리아는 그리 간단하게만 머물지는 않았다. 카나리아의 분노는 평소엔 채찍이었지만, 요소가 갖춰지면 화산이 되었다. 그것이 카나리아가 분노와 함께하는 법이었다.
유란은 한숨을 쉬며 파일을 닫았다. 보고서를 빨리 써야했지만 전부터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주일 전, 친구와의 잡담 중에 카나리아가 소재로 나왔다. 가루만 남긴 작전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고, 그렇기에 친구는 유란의 얘기에 유난히 귀를 기울였다.
유란의 얘기는 이런 농담으로 끝났다. 그냥 생각났는지, 친구가 인사부에서 일한다는 걸 노리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유란은 제발 전자였으면 했다.
"그 사람을 우리 히키코모리 크툴루에게 붙이면 어떻게 될까? 분명 격리 파기하러 온 얘들 다 박살나겠지?"
며칠 뒤, 카나리아는 특무부대 타우-9("호전적인 경호원")으로 발령되었다. 책임자는 유란의 친구였다.
유란은 따지려고 올라갔다. 하지만 친구는 뭔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유란은 농담이었다고 했다. 친구는 논리적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 아니냐고 했다. 유란은 누군가가 끔찍하게 죽을 거라고 했다. 친구는 그럼 그들을 살려두냐고 했다.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 비슷한 감정이 유란의 몸을 감았다. 이후 복도가 언제쯤 화약 냄새로 가득 찰까란 두려움이 몸을 움켜쥐었다.
유란은 두 손을 말아쥐었다. 언젠가는 책임감에 짓눌리리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작은 크툴루는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실은 던지려고 했지만 지난 번에 교체하는 데 3개월이나 걸린 걸 감안해서 참은 거였다. 화면에는 'YOU DIED'라는 글자가 나오고 있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6시간 동안 괴물이 반복하던 행위였다.
처음에는 게임에 대한 분노가, 다음은 이 게임을 가져다준 요원에 대한 분노가 등 뒤의 촉수로 분출되었다. 하지만 점점 이런 감정이 식더니, 컨트롤러를 내려놓을 때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평이한 피로만 남았다. 해탈이란 진중한 표현을 쓰기엔 너무 저열한 체념이 온 몸에 내려앉았다.
크툴루께서 고개를 드셨다. 오랜만에 주위를 둘러보셨다.
너무 작으신 것 아닌가? 그 분은 아직 성장기이니 이런 방이 작아보임도 당연직하다.
크툴루께서 손깍지를 끼시어 몸을 뒤로 젖히셨다. 오래 전부터 들렸던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었다. 눈을 여기저기 돌리시어 방을 한 번 쭉 훑으셨다. 그리고 이 벽지를 얼마나 오랫동안 봤는지, 그리고 자기 나이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헤아리셨도다. 아아, 여기서 늙어죽기까지 천 년도 오래 남았으니, 크툴루께선 우렁찬 한숨과 함께 똑바로 앉아 생각하시었다.
체념과, 무력감과, 무료함에 사로잡히시어, 벽지도 안 바뀌는 방에서 원초적인 본능이 되살아나셨으니,
그 분은 나가고 싶어진 것이다.
어릴 적에,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던 소녀들을 기억하십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든 이야기는 한 소녀가 토끼를 쫓아 토끼굴로 들어가면서 생겨났습니다. 호기심에 떨어진 토끼굴은 그 어디보다 깊었고, 다른 토끼굴과 달리 수직이었습니다. 소녀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추락했지만, 심장마비가 오는 대신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그러자 주변 풍경들도 느리게 보였고, 떨어지는 속도도 느려진 듯 했습니다. 소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집니다.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소녀는 동시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서 광기의 씨앗 하나가 소녀에게 뿌려졌습니다. 광기는 점점 소녀의 머리를 집어삼켰고, 소녀가 알던 이야기에 광기라는 무늬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떨어지면서 자기 옷이 변하고 있다 느낍니다. (정말로 변하는 걸까요?)
(빨간 구두)
소녀에게 빨간 구두가 신겨졌습니다. 기분이 좋은 소녀는 춤을 춥니다. 춤을 춥니다. 춤을 춥니다. 춤을춤을춤을춤을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춥니다. 소녀는 멈추고 싶었습니다. 소녀의 뇌는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다리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나 봅니다. 상체가 멈추자 다리는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 종아리가 몸에서 찢어져버렸습니다. 소녀는 멈췄다는 데에 안심해서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숲 속에서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다리는 계속해서 춤을 추며 멀어집니다. 움직일 수 없는 소녀는 떨어지기로 했습니다. (어라? 다리가 다시 자라났군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빨간 두건)
소녀가 숲속을 달립니다. 숲 속에서는 으레 새소리를 많이 생각하지만 새소리보다 늑대의 하울링이 더 많이 들립니다. 소녀가 달리는 이유는 무섭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빨리 달린 나머지 표지판을 지나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숲을 달리면 달릴수록 늑대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마치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소녀는 더 빨리, 더 빨리 달립니다. 이내 소녀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심부름 가는지도 까먹고 말았다는 사실을요. 앞에 반짝이는 두 눈이 보입니다. 늑대에겐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걸 소녀는 압니다. 이제 소녀는 절망하는 대신 떨어지기로 했습니다. (이미 갈기갈기 찢기진 않았을까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소녀는 잡니다. 꿈속에서 달리는 겁니다. 고요합니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소녀는 죽은 듯이 자는데 왜 썩지 않는 걸까요? 궁금증을 안고 소녀는 누운 채 떨어지기로 했습니다. (오른쪽 발끝이 썩은 것 같습니다. 아까 늑대에게 물린 자국 아닐까요?)
(신데렐라)
소녀는 위태롭게 달립니다. 양발에 꼭 끼는 유리구두가 신겨져 있습니다. 소녀는 이 시대에 강화유리가 발명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깨질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뛰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달리기 위해 힘차게 내딛어야 하는 모순이 소녀에게 닥칩니다. 어쨌든 소녀는 달립니다. 생각보다 잘 달립니다. 소녀는 즐거워하며 달리지만, 위험의 자각에 익숙해지는 순간 끝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성을 벗어나는 계단 앞에서 소녀가 힘차게 발을 딛지, 유리 구두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균형을 잃어 머리부터 쓰러지는 정신을 안고, 소녀는 굴러 떨어지기 보단 아예 떨어지기로 했습니다. (썩은 발은 안 보입니다. 피투성이가 돼서 안 보이는 걸까요?)
(오즈의 마법사)
소녀가 황금의 길을 달립니다. 이번에 소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두 마리의 동물과 두 개의 마리오네트가 그녀와 함께합니다. 인간은 없는 걸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녀는 달립니다. 여기에서 나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걸 알려면 달려야합니다. 저 멀리서 초록색 성이 보입니다. 저기가 목적지다고,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소녀는 생각합니다. 소녀는 초록색 성 앞에서 서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초록색 판넬은 소녀의 힘에도 스러져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소녀는 목적지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에 짜증내는 대신 떨어지기로 했습니다. (정말 허상이었을까요? 판넬 너머로 황금의 길이 더 뻗어있지는 않았을까요?)
(인어 공주)
소녀에게 다리가 생겼습니다. 웃긴 말이네요, 인간의 몸이라면 다리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세상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다리를 주고 목소리를 가져갔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부당한 대가이긴 하지만 다리가 있다는 거에 중요한 거죠. 그 기쁨에 소녀는 해안가를 달렸습니다. 파도가 소녀의 다리를 적셨습니다. 왠지 모를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소녀는 달리면서 밑을 봤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썩고 있습니다. 친밀한 느낌은 이래서 그랬군요. 달라가면서 썩은 곳을 털어내려고 하자, 살들이 물방울로 흩어졌습니다. 한 쪽 발로 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쓰러졌습니다. 왼쪽 다리도 뜯어졌습니다. 뜯어진 다리가 물방울로 변했습니다. 달려야 하는데, 달려야 하는데, 달 려 야하 는 데. 포기하고 떨어지기로 합니다. (정말 계속 갈 순 없나요? 여기서 멈춰야 하나요?)
(다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소녀는 멈추지 않고 떨어집니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밑에 다다른 소녀에게 잘 차려입은 토끼가 다가왔습니다. 토끼는 소녀에게 카드를 하나 건네줍니다. 소녀가 미심쩍은 손으로 카드를 받아들자 토끼는 무심히 뒤돌아 저 멀리 뛰어갑니다. 소녀는 카드를 들여다봅니다.
강 이호 씨에게
누구보다 치열한 공연을 펼치는 귀하의 극단을 한낮의 떡갈나무 유랑극단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려 유감입니다.
그래도 당신의 공연은 아주 흥미롭고, 강렬한 공연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모셔서 환영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올해 떡갈나무의 날의 손님이 되시겠다면 기꺼이 초대하겠습니다.
푸른 벌새가 아름다운 단풍을 타고 노래를 연습하는 날에
당신의 걸음이 멈추는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까지 모쪼록 평안하시길
한낮의 떡갈나무 유랑 극단
단장
장산
소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반쯤은 예상한 일이어서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소녀는 앞으로 뛰쳐나가 토끼를 따라 나섰다. 소녀는 이제 아가씨가 된다.
무대 오른쪽의 떡갈나무 위에 총천연색의 벌새가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피리 같은 새소리만 나는 게 아닙니다. 가끔씩 트럼펫 소리도, 바이올린 소리도, 심벌즈 소리는 왜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노래가 새의 부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소리에 지기 싫었는지 떡갈나무도 소리를 냅니다. 새가 발로 떡갈나무를 두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떡갈나무는 팀파니의 소리를 냅니다. 떡갈나무의 속이 빈 것처럼 웅장한 소리가 났습니다. 떡갈나무와 벌새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합니다.
오케스트라 소리가 점점 더 커집니다. 특히 팀파니 소리가 점점 더 커집니다. 이들이 서있는 무대가 무너질 것 같습니다. 벌새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합니다. 쿵 쾅 쿵. 삐리릭. 쿵 쾅 쿵. ..삐리릭?,,. 벌새가 이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하지만 이미 무대에는 금이 갔고, 팀파니는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벌새는 쓰러지는 떡갈나무를 피해 날아오릅니다. 하지만 무대 천장에 부딪쳐 떡갈나무와 같은 결말을 맞이합니다. 무대의 왼쪽 3분의 1이 무너집니다. 떡갈나무가 쓰러지고, 벌새도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팀파니 소리는 멈췄지만 떡갈나무의 진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머지 3분의 2 중 가운데 부분의 진폭이 커집니다. 곧 나무와 벌새도 무대 아래의 어둠으로 툭 하고 들어갈 겁니다.
그러자 무너진 틈새에서 흰 뱀이 한 마리 나옵니다. 뱀이 나오자 자연스레 왼쪽 무대가 고쳐집니다. 뱀은 바로 벌새와 떡갈나무를 감싸고 똬리를 틉니다. 벌새는 당장은 안심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불안한 감이 남아있습니다. 벌새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립니다. 흰 뱀은 눈을 가로로 뜨고 조용히 바닥에 머리를 누입니다. 새가 불안해 하지만, 뱀이 피곤해하면서도 눈을 뜨는 한, 평화는 유지될 겁니다. 일단은요.
이번엔 떡갈나무가 있는 오른쪽 무대에서 푸른 뱀이 나옵니다. 벌새와 떡갈나무의 음악에 겨울잠에서 깼나 봅니다. 하얀 뱀의 노곤한 인상과 다르게 푸른 뱀은 포악한 인상입니다. 푸른 뱀이 쉿쉿거리면서 고개를 쳐들자, 하얀 뱀도 지지않고 고개를 듭니다. 벌새는 겁에 질립니다. 총천연색 벌새 같은 새들을 주로 잡아먹는다고 알려진 푸른 뱀입니다. 벌새는 날아가려 하지만 하얀 뱀이 놓아주지 않습니다.
두 뱀은 대치하고, 벌새는 날아가지 못합니다. 벌새는 이제야 불안감이 어디서 왔는지 눈치 챕니다. 흰 뱀이 튼 똬리의 힘은 벌새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떡갈나무를 부술 만큼 강했습니다. 벌새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나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갈 수 있어도 푸른 뱀한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벌새는 마지막을 직감합니다. 언제나 사고의 끝은 이거였습니다. 누군가가 남긴 존재가 사라지는 것으로.
순간, 공중에서 초록색 뱀이 나타납니다. 초록색 뱀은 두 뱀이 대치하던 곳으로 떨어지고 두 뱀을 서로 털어냅니다. 흰 뱀이 순간 똬리를 풀자, 벌새는 바로 날아오릅니다. 초록 뱀은 두 뱀에게 쉿쉿거리며 위협합니다. 흰 뱀은 일단 거리를 두다가, 벌새가 빠져나온 걸 보고, 입맛을 다시며 왼쪽 무대의 틈을 열고 들어갑니다.
푸른 뱀은 초록 뱀을 보자 더 포악해져서 초록 뱀에게 달려들려고 합니다. 감정적인 공격을 예상한 듯이 초록 뱀은 푸른 뱀의 공격을 피하고 떡갈나무를 감싸 똬리를 틉니다. 벌새는 초록 뱀을 따라 떡갈나무 위에 다시 앉습니다. 초록 뱀은 벌새가 앉은 걸 확인하고 떡갈나무와 벌새와 함께 사라집니다. 무대에는 푸른 뱀만이 남아있습니다.
푸른 뱀은 주변을 살펴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푸른 뱀은 관객을 봅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푸른 뱀은 화가 나서 고개를 더 빳빳이 듭니다. 혀가 더 격렬하게 왔다갔다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사냥은 허탕입니다. 다음 벌새의 연주를 기다려야겠지요. 푸른 뱀은 시무룩해진 듯 머리를 바닥에 붙이지만, 동시에 기민하게 왼쪽으로 무대를 빠져나갑니다.
암전.
밝아지자 무대에는 소녀가 있습니다. 왼쪽으로 박수를 치자 왼쪽으로 퇴장했던 푸른 뱀이 나와 소녀의 왼쪽 다리를 감습니다. 오른쪽으로 박수를 치자 이번엔 오른쪽 무대 밑에서 흰 뱀이 나와서 소녀의 오른쪽 다리를 감습니다. 양 손을 위로 들자 아까처럼 초록 뱀이 나타나 소녀의 품에 떨어져 소녀의 목을 감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손 검지를 눈높이로 들자, 관객석 뒤 쪽에서 총천연색 벌새가 날아와 소녀의 손가락에 앉습니다.
소녀는 한 마리의 새와 세 마리의 뱀을 두르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무대에서 떡갈나무 7 그루가 솟아오릅니다. 무대가 밝아진 순간부터 이때까지 관객은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커튼.
어둠이 내린 무대 뒤에서…
시호야 이거 봐.
이게 뭐야?
떡갈나무의 날 초대장.
어머! 드디어 하는 거야?
그럼, 드디어 우리의 첫 번째 대형 공연이 시작되는 거야.
언제? 어디서?
푸른 벌새가 아름다운 단풍을 등에 매고 노래를 연습하는 날, 당신의 동물들이 눈을 고정하는 곳.
가려면 꽤나 걸리겠네. 출발하자!
뱀이 목과 팔을 감고, 벌새가 어깨에 앉았다. 무대 뒤의 핸들을 잡고 악셀을 누르자, 무대는 하나의 밴으로 접혀 앞으로 튀어나간다.
친구에게 그저 농담이었다고 따졌을 때, 어쨌든 맞는 말이 아니냐던 반박이 사실이라는 것쯤은 유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복잡했다. 유란이 보기에 ― 아니, 평범한 상식으로 보기에도 ― 카나리아의 상태는 치료의 대상이지 활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재단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지만, 적어도 유란이 알기에는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었고, 그러한 재단에 속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2662의 숭배자들을 손쉽게 제압하며 복도를 누비는 카나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는 유란은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짬이 생겼을 때, 카나리아가 빠르게 손짓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핵심만 빠르게 전달한, 문장조차 아닌 문장이었지만 이미 이런 대화가 익숙했기에 유란은 카나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카나리아가 하고싶은 말은, 틀림없이 '이상하네요. 미리 받아본 보고서를 보면, SCP-2662은 협조적이라면서요. 숭배받는 것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고. 그런데 격리 실패라뇨. 납치라도 당한 건가? 그러고보니 이 녀석들도 사전에 받은 보고서 내용과 다릅니다. 전혀 광신도의 모습이 아닌 걸요.'
"광신도의 모습이 아니라고요? 그런 건 어떻게…"
말을 꺼냄과 동시에 유란은 자신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했지만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했지만 그렇다고 '하긴, 당신만큼 광신도를 잘 아는 사람은 없겠죠.'같은 말로 이 상황을 무마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너도 잘 알지않냐?'하는 듯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카나리아에게, 유란은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카나리아는 바보가 아니었고, 생각해보면 당연히 자신과의 면담이 전근을 불러왔다는 사실도 어느정도는 알 터였다. 물론 카나리아는 정확히 어떤 이유로 근무지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테고, 이 인사가 정말로 좌천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카나리아는 유란과의 면담이 이 '좌천'을 불러왔다고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카나리아의 방에 들이닥쳤을 때 순간적으로 보였던 아니꼬운 표정은, 단순히 아침부터 저렇게 높으신 양반이 왜 내방에 왔느냐는 불만만 반영된 것은 아니었으리라.
"크흠. 어쨌든, 정확한 정보는 아직이요. 현장에 도착해봐야 알 수 있을겁니다. 어쩌면, 주기적으로 숭배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제3의 다른 존재가 있을지도."
유란은 마치 길잃은 개미처럼 멍하게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공격해오는 숭배자에게 반격을 가하며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유란은 카나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재단을 뚫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고 조직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뭔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그건 그거대로 또 광신도같긴 했지만, 아무리 홀린 듯이 멍해도 무언가를 숭배하는 자라면 그 특유의 적극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지가 거의 통째로 2662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례적이지만, 확실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도 이례적이었다. 유란은 뭔가 다른 요인이 개입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O5-10이 친히 명령을 전달할 리도 없었을 터. 유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례적인 상황이니만큼 가능하기만 하면 차후 새로운 격리절차 확립을 위해 가능하다면 이 숭배자들을 생포할 필요가 있음은 분명했다. 2662의 상태도 확인해야겠지. 유란은 상황을 정리하며 끊임없이 카나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가장 큰 목적은, 굳이 사살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거리낌없이 총과 칼을 휘두르는 카나리아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서. 중간에 합류한 정신 멀쩡한 경비원 둘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죽일뻔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결국 달라진 건 없는 거 아닙니까? 여전히 저희가 할 일은 이 종교쟁이들을 뚫고 상황을 파악한 후, 2662를 다시 격리 하는 것. 복잡한 생각은 저희처럼 몸 쓰는 사람들의 역할이 아니에요.'
"당신과 달리 전 말씀하신 그 복잡한 생각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습니다만."
'적어도 지금 임무에선 아니잖아요?'
유란의 노력은 별 소용이 없었다. 카나리아의 솜씨는 마치 주인공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영화를 보는 기분을 들게 했고, 동시에 조금의 자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나리아에게서 보았던 문제가, 새삼스럽게 더 와닿았다.
이래나 저래나, 그 덕에 둘은 큰 어려움 없이 잡담까지 나눠가며 상황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란은 미묘한 표정으로 처음 챙겨들었던 권총을 바라보았다. 사용한 탄환은 단 2발. 그마저도 카나리아의 방에 가는 길에 썼지, 카나리아와 합류한 이후로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막바지에 들어서는 카나리아가 유란의 뜻을 따라주었기에 시설 곳곳에 숭배자들을 묶거나 가둬두느라 시간이 조금 더 소모됐지만, 이렇다할 문제는 없었다. 악착같이 달려들긴 했지만, 어딘지 나사빠진듯한 숭배자들은 유란의 기준으로도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었는데 카나리아에게는 오죽 했으랴.
이들이 상황실을 찾은 것은, 별다른 기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CCTV는 훼손됐을 거라 생각했고, 그저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의 녹화본을 챙기려던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숭배자들은 CCTV를 전혀 건들지 않아 시설 내부를 쉽게 살필 기회가 생겼고, 카나리아 역시도 뜻밖의 수확에 눈빛이 반짝였다.
2662의 격리실의 카메라를 확인했을 때는, 상황실 문을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회수할만한 것이 있을지 수색하러 가기 전, 남은 잔당이 있을까 확인하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또다시 의외의 수확을 건져올렸다. 격리실패가 벌어졌다는 2662가, 여전히 격리실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격리실패라는 것이, 꼭 격리실을 빠져나가야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긴 하지."
유란은 전문가씩이나 되는 양반이 당연히 2662가 탈출했을 거라 여긴 것이 부끄러운지 웅얼거렸다. 숭배자 발생을 통제할 수 없어 불편하다는 녀석의 주장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미안해지기도 했다.
카나리아는 유란이 중얼거리는 말에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여 대답할 뿐,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으로 무장을 점검했다.
이 때까지도, 이들은 O5-10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것에 비해 일이 너무 쉽다는 의심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사실,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고있던 O5-10조차도, 새로운 변수로 일이 더 골치아파질 것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방심한 것은 모두가 똑같았다.
촉수로부터 온 몸으로 이어지던 끔찍한 고통과 머리를 울리던 소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한심하긴.]
그 대신, 아직은 어리신 위대하신 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알고 있었던 O5-10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SCP-2662에게 가까워질수록, 돌파는 점점 힘들어져야 정상이다. 아니, 실제로 더 힘들어지기는 했다. 단지 카나리아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을 뿐.
"…"
사정을 모르는 O5-10는 감탄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격리실에 도달한 유란의 감정은 당황도 안도도 아니었다. 유란이 느낀 것은, 다름아닌 슬픔이었다. 지금까지 사용한 탄환은 총 3발. 카나리아와 합류한 이후로는 단 1발만 사용했다. 그 마저도 기세좋게 문을 걷어찬 카나리아를 머쓱하게 만들어버린 문의 비상잠금장치를 작동시키기 위해 벽을 쏜 것이었다. 사실상 혼자 싸운 카나리아는 호흡이 거칠어지지도 않았다. 카나리아의 몸놀림은, 분명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린 만큼 경험이 모자라 다른 요원들에 비해 모자란 점도, 바로 보이진 않더라도 굳이 찾아내려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타고난 재능이 출중한 것도 아니었고, 변칙적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란의 눈으로 보기에, 카나리아의 능력은 '운'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카나리아의 전투는, 마치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는 것만 같았고, 그에 맞서는 적은 결국 장난감을 사주고야 마는, 자식에게 지는 부모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유란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유란은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곳에는, 아이같은 카나리아가 아니더라도, 진짜 '아이'가 있었다. 물론 보고서에도 충분히 언급되고 있으니만큼, 이 곳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사실이 이렇게까지 와닿을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으레 부모도 있기 마련인 법.
통신장비 너머의 O5-10은, 자신이 각오했던 위험은 걱정거리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위원회에서 사실상 묵인해버린 다른 빌어먹을 위원해 놈들의 헛짓거리는, 정말로 헛짓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미 2662는 기존의 영향에서 벗어나 온전히 정신을 되찾은 듯했고, 숭배자들이 기존과 양상이 달랐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이 뻔해보였다.
[기껏 가출해서 이룬 것이, 고작 인간의 시설에 짐승처럼 갖혀지내는 것이더냐.]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격리실을 가득 채웠다. 분명 이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시덥잖은 수작질에 놀아나 이용당해 이런 수모를 겪다니. 이럴 바에는…]
단 한사람, 위대하신 분보다 더 위대한 것이 분명한, 그의 아버지의 말을 감히 끊으며 한 발 앞으로 내딪는 카나리아만 빼고.
[혹시 너냐? 그 때의 그 위대하신 개새끼.]
카나리아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위대하신 분의 권능으로 그 속마음은 격리실에 있던 모두에게 닿았다.
'젠장. 다 죽게 생겼군.' 카나리아의 과거와 지금까지의 행보로 보건데, 유란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거 또 눈 돌아갔네.'
카나리아의 손에는 언제 챙겼는지 모를, 복도에 있던 소방도끼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