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빛을 안개에 흩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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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 안개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모르게 만든다. 안개 안에 든 사람은 그저 흰색 무(無)에 혼자 둘러싸인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무진은 고독한 곳이다. 고독은 사람의 내면을 제 힘으로 끄집어내어 그 자신이 그걸 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본 사람은 곧 자기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워진 사람은 그 속을 닦으러 이곳에 온다.

무진 지하의 한적한 바. 안개가 벗어난 곳으로.

어쩌면 당신은,
미치광이 살인마 예술광일수도 있다.
쉼터를 찾는 여린 소녀일수도 있다.
그저 웃고만 있는 발랄한 여인일수도 있다.

안개가 섞인 해변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안개에도 흐려지지 않는 한 문이 나타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퍼지고, 곧 상큼한 술냄새가 어우러져 바 내부를 아름다운 기대감으로 가득 채운다.

자리에 앉으면, 어제와 다르면서도 언제나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바텐더가 술을 권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남을 내리누르는 괴팍한 상사일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짓눌린 공학도일수도 있다.
신의 선택을 거부하는 신일수도 있다.

당신은 이 바에 재밌는 방법으로 왔다.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오는 손님도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은 왼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온다. 이 방법의 장점은, 기다림 없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은 그저 바에 앉아 입구로 서서히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된다.

흥미로운 사람들 아닌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당신은,
성공한 연인이자 실패한 연인일수도 있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새로 나아가는 군인일수도 있다.
오직 복수만이 남은 도사일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안개 속에서 지친 채 이곳을 찾는다. 고독을 잊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다. 실패한 사람들이 많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이제까지 몰랐던 사람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지겨운 이야기를 크게 되뇐다.

누구든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도시가 대신 울부짖는다.

어쩌면 당신은,
우주의 틈새를 거닌 사람일수도 있다.
모든 걸 멈추려 피 흘리는 희생양일수도 있다.
책에 나온 존재가 낳은 자식을 수 있다.

사람들이 바텐더를 찾는다. 바텐더는 이 실패한 자들을 위해 카드와 입을 놀린다. 듣는 말을 무게는 그 사람을 흩어놓거나 무겁게 내려놓는다. 하지만 바텐더에게선 이 말들이 주변을 회오리치다가 하나에 뭉쳐진다. 그렇게 밖으로 꺼내어진 속내를 바라보며 빈 속을 술로 채운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직업이라고, 바텐더의 속내가 들린다.

어쩌면 당신은,
전쟁에서 죽은 이를 담는 이일수도 있다.
원치않는 행진에 동참한 청년일수도 있다.
속임수와 죽음을 업으로 삼는 자일수도 있다.

나갈 차례가 되면 많은 이들이 비틀거리면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위로 올라간 이들은 다시 안개 속을 헤메이며 내놓았던 속을 다시 공허감으로 가득 채운다. 역시 저 중 대부분은 사람은 하루치의 공허감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이곳으로 올 터이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당신 출구는 반대편입니다. 바텐더가 당신에게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마저 속이는 사람일수도 있다.
어상한 나라로 끌려다니는 어른일 수도 있다.
비극에 매몰된 자일수도 있다.

반대편에는 세계의 출입구가 있다. 첫 번째 출입구는 도서관에서 오는 사람들이 몰래 이용하는 통로다. 세 번째 출입구는 오래 머물고 싶은 연인을 위한 방이 있는 곳이다. 두 번째는 사실 출입구는 아니다. 오로지 출구만이 있을 뿐.

출구로 나가면 밑으로밑으로밑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검은 계단이 있다.

어쩌면 당신은,
책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연구원일수도 있다.
과거를 다시 찾아가려는 악단의 일원일수도 있다.
어딘가로 빠져버린 사제일수도 있다.

바텐더가 말한다. 감미로운 목소리지만 계단에서 제일 처음 잊게 되는 것이다. 저 너머의 칠흑색 네모는 인생의 마침표이다. 바텐더는 안내하는 동안에 이야기를 카드에 담아 마지막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문이 닫힌다. 바텐더의 말놀림이 여전히 바 안에 둥둥 떠다닌다.

그거 아세요? 무진에는 해변이 없어요. 결국 모두 꿈을 향해 출항하는 항구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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