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교환: c_bonefish

밤이 깊어지고 불야경 같던 도시에도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건너편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본 해수는 책상에 놓인 시계를 들고 확인하였다. 오전 12시 36분, 슬슬 졸려오는 시각이었다. 지금이 늦은 밤이라는 것을 인지한 탓인지 해수의 눈도 자츰 감겼다. 아이디어 스케치도 거의 다 완성되었겠다, 해수는 그만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였다.

물 한 잔 마시고 불을 끈 해수는 창가 옆의 침대에 지친 몸을 이끌고 이불 속으로 애벌레처럼 들어갔다. 그녀는 집으로 이사올 때 조금 무거웠지만, 새로 장만하는 대신 원래 쓰던 이불을 챙겨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자 하품과 뒤척이는 소리가 조용해졌다. 그저 잔잔한… 규칙적인… 숨소리… 만이… 들… 려…

Zzzzz……

눈을 뜬 해수는 자신이 어떤 하얀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언제부터인가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자연스럽게 열고는 그 안에서 여러 스프레이와 페인트통을 꺼냈다. 이상한 점은, 가방 안에 주머니 차원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피가 큰 물건들이 안에서 술술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수가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꺼내자, 그녀의 주위에서 여러 건물과 구조물들이 순식간에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해수는 루시드 드리머, 즉 자각몽을 자주 꾸는 사람이었다. 자각몽 안에서는 전혀 지치지도 않을 뿐더러 원하는 배경과 요소들을 마음껏 창조할 수 있어 그야말로 예술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 최적의 공간이었다. 해수는 잠자는 시간에도 이 자각몽 안에서 여러 번 아이디어를 궁리하고 거듭 실현하여 Are We Cool Yet? 내부에서 이름 높이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그래, 웃음을 유발하는 노란색을 좀 더 섞어보자."

해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노란색 스마일이 그려진 스프레이통을 흥겹게 흔들고는 이번에 준비할 작품 구상을 시작하였다. 화려한 색의 페인트를 자유분방하게 뿌리던 도중, 그녀 등 뒤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가방을 든 채로 서 있었다. 해수는 그가 인기척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자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여기가 꿈 속이라는 사실을 되뇌이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어… 그만 가주시겠어요? 골똘히 생각할 게 있어서…"

"아! 걱정 마세요.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잠시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으신가요?"

남자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화답했다. 해수는 기괴한 얼굴을 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장소를 바꾸기로 하고 손가락을 가볍게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주변의 건물들을 온데간데 사라지고 그저 커다란 콘크리트 벽과 사막이 나타났다. 해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작업에 열중하려고 했지만,

"안녕하세요!"

"으아악! 너, 너 뭐야?"

"제 이름은 '뭐'가 아니랍니다, 오네오로이 공동체 소속의 '꿈 잘 꿈 연구소'에서 일하는 틀롱입니다!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

이 '틀롱'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후에 해수가 수십 번 장소를 바꾸고, 심지어 그를 죽이는 상상까지 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짓기만 하였다. 해수는 그런 그가 점점 두려워졌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너 이 꿈 속 사람 아니지? 아니, 애초에 여기가 꿈 속이라는 거 알지?"

"당연하죠! 그러니까 제가 당신과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꺼져!"

해수는 극심한 공포심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라도 좋았다. 틀롱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분명 자신의 꿈 속인데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자 해수는 매우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항상 틀롱이 미소짓는 표정으로 바로 뒷쪽에 서 있었다.

"제, 제발, 좀 저리 꺼지라고오오!"

이 악순환은 해수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적어도 수천 번은 뒤를 돌아보고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zzzzZ… !

"으아악!"

해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몇 년만에 꾼 악몽이었다. 침대보는 땀 때문에 축축히 젖어 있었고, 이불은 그녀가 자면서 몸부림치며 걷어찼는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맡에 있던 스마트폰은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웅웅대다가 이내 멈췄다. 불안한 기분이 들어 화면을 살펴보니,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의 전화가 합쳐서 수십 통은 와 있었다.

해수는 눈을 감고 자신이 아직 꿈에 있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이었다. 해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창문을 열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하루를 완벽하게 망치고 돌아온 해수는 그날만큼은 작업에 매진할 의욕이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결국 해수는 간단하게 저녁밥을 지어 먹고 이를 닦은 다음 곧장 침대로 몸을 던졌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끼익거리며 위로 튀어올랐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흐릿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니 기진맥진하던 몸이 그나마 나아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또다시 그 남자가 나타나 악몽을 꿀까봐 문뜩 걱정이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없던 해수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 져… 들었…

Zzzzz……

"안녕하세요!"

"으아악! 아, 제발, 또야?"

해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들려오는 기괴할 정도로 해맑은 목소리에 기겁해 넘어지고 말았다. 해수는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틀롱이었다.

"또 만났네요! 오늘은 저랑 얘기 좀 나눠주시겠어요?"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그 놈의 미소 좀 집어치워요! 무슨 디스맨도 아니고."

"아, 그러죠."

해수의 말 한 마디에 틀롱은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얼굴을 보였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 때문에 해수는 틀롱이 더 두려워졌다. 그는 갑자기 들고 있는 가방을 열고 무언가 열심히 꺼내기 시작했다. 모두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

"이게 다 뭐에요?"

"저희 꿈잘꿈 연구소에서 개발한 신제품들입니다. 당신 같은 루시드 드리머에게 딱 어울리는 물건들이죠."

"아니, 그럼 왜 저 같은 루시드 드리머만 노리는 건데요?"

"그야 꿈을 온전히 기억하니까죠. 여러 조각으로 기억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면 판매하는 의미가 없거든요. 자, 이거 한 번 써보시겠어요?"

"뭐요?"

틀롱은 아랑곳 않고 가방에서 이상한 물약 한 병을 꺼내 해수에게 보여주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분홍빛 액체가 거품을 일으키며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잘못 먹으면 큰일날 것 같은 색깔이었다.

"꿈 속에서 이 '이상야릇 꿈꾸물' 한 병만 마시면 쉽게 꾸기 힘든 야시시한 꿈을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답니다! 이것도 봐보세요. '다이어트용 꿈먹꿈먹'으로 꿈 속에서 마음껏 먹고 현실에서는 편하게 다이어트를—"

"잠깐만요, 죄송한데 저는 야한 꿈도, 뭐 먹는 꿈도 딱히 필요하지 않아서요. 예술가에게 알맞는 꿈은 없을까요?"

"음, 예술가라… 그렇다면 이거는 어떤가요?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출시한 꿈은행 상품입니다. 계약만 하시면 매달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는 대신에 당신의 일정한 수명을 가져가죠!"

해수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제발 꿈에서 깨어나라고 자신에게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틀롱은 여전히 물건들을 들어놓으며 떠들고 있었다.

"어… 저는 이만 갈게요.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잠깐만요! 이것만이라도—"

"됐어요!"

해수는 또다시 도망을 시도했지만 어젯밤 꿈처럼 도망가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일이 반복됐다.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틀롱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해수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덩치가 커져 나중에는 꿈 속 배경에 있는 산을 완전히 가릴 만큼 거대해졌다.

"당신만한 사람을 얼마 만에 찾았는데! 오랜만의 손님을 놓칠 수야 없지!"

"으아아악!"

틀롱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해수를 짖누르자, 마침내 어둠이 찾아왔다. 얼마 안 가 눈부신 빛이 커튼 틈으로 새어나와 해수의 눈을 비추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또 바닥에 떨어진 이불 끝부분을 쥐었다.

결국 해수는 다시 한 번 하루를 완번하게 망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 부분을 더 강조하자는 가지."

"차라리 색감을 화려하게 가는 거 어때? 그러면 관객들 눈도 순식간에 사로잡을 테고, 또… 야, 야, 윤해수. 너 괜찮아? 요즘 너무 졸려하는 거 같은데."

며칠 동안 똑같은 악몽을 꾼 해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만큼 비몽사몽하였다. 밤에 잠을 못 자니 낮에 졸음이 쏟아져와 작업은커녕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해수의 이상한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층간소음 때문에 잠 설쳤냐? 아니면 벌레라도 나왔어?"

"아니, 잠 설친 건 맞는데… 얘기가 좀 길어."

해수는 눈을 비비며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전부 털어놓자 친구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중 한 명인 시우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한 '꿈잘꿈 연구소'라는 건 또 뭐야?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몰라. 자기 말로는 '꿈 안팎을 오가며 사업한다'고 하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회사라고. 게다가 알겠다고 말하면 이상한 물건을 꺼내놓고서는 강매를 시도한다니까? 괜히 샀다가 무슨 일 생길까봐 뭐라고 할 엄두가 안 나."

"흠… 일단은 그 틀롱이라는 놈을 네 꿈 속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게 급선무인데. 혹시 집에 드림캐쳐 있어?"

해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드림캐쳐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쉽게 해결될 거라고 기대조차 안 한 상태였다. 시우가 깊게 생각에 잠기고 나자 그 옆에 묵묵히 앉아만 있던 승연이 커피잔의 빨대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어쩌면… 너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한 명 아는데, 도와달라고 해볼까?"

"진짜? 고마워, 정말!"

"그 사람은 해수처럼 루시드 드리머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일단 이거 한 번 봐봐."

승연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후 잠시 타자를 몇 번 치다가 화면을 둘에게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개인 블로그였는데, 거기에 실린 사진 속에는 블로그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사람과 상담하는 한 여자가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블로그 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6년 전부터 해몽과 악몽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무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리전 것을 무당 덕분에 깔끔히 해결해냈다고 쓰여 있었다.

"저번에 엄마가 기묘한 꿈을 꾼 적이 있어서 이 무당한테 찾아가봤더니 친했던 사람이 곧 돌아온다고 말했다고 해. 그러고 한 사흘 후엔가, 옛 절친이 우리 동네로 이사와서 그 식구 가족들이랑 같이 밥도 먹었었지. 완전 용하다니까?"

"무당이라… 이 사람, 믿을 만할까? 다큐에서 나오는 뭐 그런 사람은 아니겠지?"

"한 번 가보자. 오히려 무당이라는 스토리가 네 작품에 들어가서 더 쿨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나라면 그 이상한 놈한테 계속 시달릴 바에 무당한테 의지할 걸."

시우가 킥킥거리며 남은 커피를 빨아마셨다. 얄미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해수는 꿀밤이라도 때리고 싶어졌다.

"일요일에 시간 빌 때 같이 가보자. 문제 생기면 내가 보장할게."

"하… 좋아. 한 번 가보지, 뭐."

시우와 승연의 설득 끝에 해수는 이번주 일요일에 그 용하다는 무당에게 찾아가보기로 결정하였다. 문제는 그때까지 틀롱의 꿈 속 영업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곧 이 끔찍한 악순환을 끝마칠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틀롱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기관총 세레처럼 말을 쏟아내며 해수를 쫓아다녔다.

시우가 먼저 용기있게 닫혀 있는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 뒤로 해수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건물을 쓱 둘러보았다. 조금 낡은 집이었지만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건물이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문 건너편에서 무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금방 갑니다. 잠시만요!"

사진에서의 모습을 보고 상상한 목소리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해수는 무당의 실제 모습을 어떨지 살짝 기대가 되었다. 얼마 안 가 문이 바깥으로 열리고 무당이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해수는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의 목소리가 놀랐다. 또 집 앞마당이 여러 식물과 동양풍의 그림으로 덮혀 있는 것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집은 평범한 단독 주택이었지만, 문 윗쪽에 노란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가 눈에 띄는 부적이 커다랗게 붙여 있었다. 무당이 일하는 방 안에는 조금 어두운 조명과 커다란 병풍, 그 앞에 넓은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자, 손님들은 무슨 꿈 때문에 여기로 찾아오셨죠?"

무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승연이 멍을 때리고 있던 해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해수는 부릅 정신을 차리고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1주일 전부터 계속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자각몽을 자주 꾸는데, 요새 자꾸 이상한 남자가 제게 물건을 영업하며 강매하려고 합니다. 제가 싫다고 거부하면 자꾸 강요하고 도망치면 뒤에서 계속 쫓아와요…"

얼핏 들으면 엉뚱한 소리로 넘길 만한 말이었지만 무당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주었다. 시우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지금 이 광경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해수의 말이 끝나지 무당은 팔짱을 기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서랍에서 꺼냈다.

"자, 이거면 될 겁니다. 부적이 담긴 이 주머니를 손에 꽉 쥐고 잠에 드세요. 하룻밤만 잘 버티면 금방 해결될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이 가루를 물에 타 드세요."

"이거 먹어도 되는 거에요? 무슨 가루이길래…"

"바싹 말린 맥의 꼬리를 곱게 간 가루입니다. 몸에 해롭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무당은 해맑게 웃으며 가루가 담긴 비닐팩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얼핏 보면 미숫가루처럼 보일 만큼 희멀건 색이었다. 시우는 방금 전까지의 흥미로움은 어디 가고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반대로, 승연은 미리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수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지금으로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이 분 밖에 없는 걸. 딱히 다른 방도가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나저나, 제가 꾸는 악몽에 시달리던 사람이 전에도 있었나요?"

해수가 비닐팩과 주머니를 받고 무당에게 물었다. 무당은 서랍을 닫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 '틀롱'이라는 자는 꿈에만 있는 존재가 아닐 겆니다. 분명 손님과 같은 루시드 드리머겠죠. 잘은 모르겠지만, 오네오로이 공동체는 그런 꿈 속의 또다른 자신들이 모인 단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어서 저도 아는 부분이 많이는 없습니다."

"평범한 악몽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 이런 형태의 꿈은 루시드 드리머만 꿀 수 있는 건가요?"

시우가 궁금했던 점을 털어놓으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승연은 아까부터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마도요. 해수 씨가 말한 대로 그들의 목적은 상품 판매이니 이왕이면 저번의 꿈을 기억하고 이를 써먹을 수 있는 사람에게 파는 게 성과 올리기 좋을 테니까요."

"일단 오늘밤에 한 번 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또 찾아와도 되나요? 그러니까, 해보긴 할 건데 실수를 한다든가, 뭐 이런 거 때문에 잘 안 되면…"

해수가 말 끝을 흐리면서 허둥지둥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당은 대답 대신 웃으면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승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두 명도 거의 동시에 일어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남은 시간 동안 해수는 밤잠을 잘 잘 수 있도록 졸음을 참으면서 낮 시간을 보냈다. 늘 그렇듯, 쏟아지는 졸음을 참는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시우: 이제 잘려고? 부적은 챙겼어?

승연: 그 가루도 먹어야지

해수는 피식 웃고는 OK 사인을 하는 이모티콘을 대화방에 전송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11시 50분 즈음. 얼른 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일찍 자려고 했다. 주머니는 혹시나 중간에 놓아버릴까봐 손바닥에 테이프로 붙여 고정시켰다.

해수는 손바닥에 붙은 주머니 때문에 불편한 자세로 식탁 위의 비닐팩을 쥐고 물컵에 부었다. 뽀얀 가루가 물에 서서히 녹으면서 밝은색의 액체가 나타났다. 그 색깔 때문에 마시기를 망설이던 해수는 몇 분이 지나서야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아무 맛도 안 느껴졌다. — 어쩌면 해수가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 결과물일 지도 모른다.

해수: 나 이제 잔다. 아침에 생존 신고할게 ㅋㅋㅋ

시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자

승연: 굿나이트

해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아까 먹은 가루의 효과 때문인지 졸음이 일찍 찾아왔다. 해수는 하품을 크게 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점점 눈이 감겨오고… 머릿속은… 이제… 아무… 생… 각도….

Zzzzz……

"안녕하세… 어라? 뭐야?"

틀롱이 여김없이 해수의 꿈에 나타나 인사를 전하다가 갑자기 말을 흐렸다. 해수는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틀롱이 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당황한 나머지 가방까지 던져버린 채로 끙끙대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잠깐만요! 언제부터 저를 조종할 수 있게 된 거죠? 망할, 이젠 팔까지…"

"조종? 저는 그런 거 한 적 없는… 아!"

그 순간, 해수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부적 주머니를 떠올랐다. 부적 덕분에 꿈 외부의 사람도 자각몽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틀롱의 몸은 점점 굳어져 갔지만 입은 계속 주절거렸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이 개새끼가! 이런다고 내가 못 올 거 같아? 그래봐야 다음에 꿈 꿀 때 또 오면 되거든!"

"되게 끈질기네. 이제 좀 꺼져주면 안 돼요?"

"루시드 드리머 찾는 게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아? 못 가!"

틀롱의 끈질김 때문에 해수는 꿈 속임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배가 꼬르륵댔다. 현실의 자신이 배고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굉장한 허기가 느껴진다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배가 고픈 것이 고통으로 변해갔다. 마치 오래 굶으면 뱃속이 쓰라른 기분이었다.

해수가 고통 때문에 앞으로 무릎을 꿇고 넘어지자, 틀롱이 기괴한 웃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독종이었다.

그때 해수의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졌다. 그러고 고개를 들어보니 형체가 흐릿한 무언가 맛있는 게 보였다. 석류? 고기? 아니면 다른 음식?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허기를 달래는 데 최고의 음식이 그냐의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라디오 잡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해수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한 번 물어뜯어보니 달콤한 맛이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발톱이 길게 자라고 이빨이 뾰족해졌지만, 해수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간만의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 잡음은 더 커져가다가 곧 끊기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조각을 입에 던지고 맛을 음미하고 나서야 해수의 손이 — 정확히는 '다리'가 — 검붉은 액체로 덮혀 있는 것이 보였다. 상관 없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꿈을 꾸니 마음도 편했다.

…zzzzZ !

만족스러운 꿈을 꾸고, 해수는 서서히 눈을 뜨고 울리는 스마트폰을 건드렸다. 기상 알람이었다. 아침이라는 사실에 몸이 무거워진 해수는 3분 정도 뒹굴거리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하지만 굉장히 좋은 꿈이었다는 사실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불현듯 어제의 일이 생각난 해수는 급하게 대화방에 들어가 생존 신고를 하였다. 하지만 시우와 승연, 둘 모두 아직 자거나 확인하지 못했는지 응답이 없었다. 해수도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하여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갑자기 홀린 듯이 한 단어를 검색하였다.

맥(貘)

동아시아 설화에 나오는 전설 속의 동물로, 코끼리의 코와 곰의 몸, 소의 꼬리,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톱 등이 섞여 있다고 전해진다. 맥의 주식은 금속, 뱀, 대나무, 특히 제일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의 악몽이라고 한다. 한국의 불가사리가 이 맥의 이야기에서 따와 탄생하였다고도 한다. 맥의 가죽은 요괴를 물리치는 데 효과가 좋다고 하며…

해수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어제 먹은 가루를 담았던 비닐팩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끈적거리는 손바닥을 펼쳤다. 주머니 안이 텅 비어 있는지 손바닥을 접을 때 같이 접혔다. 창 밖으로 시원한 아침 공기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느껴졌다. 어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수는 눈을 감고 10분만 더 자기로 하였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악몽을 잡아먹은 예술가의 승리였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저야 잘 지내죠. 이렇게 목소리 들으니 반갑네요. 다름이 아니라 뭔가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네, 네. 아무래도 오네오로이에서 자각몽 꾸는 사람을 대상으로 영향을 주는 모양이에요. 어제에 한 명 더 와서 지금까지 알려진 사례만 20건이 넘고… 조치가 필요할 듯합니다."

"아뇨,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해결해보려고요.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주변에 또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 거라서, 하하. 네."

"한동안은 이번 일에만 집중해야 할 듯 싶어서 조만간 만나뵐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아, 그럼 그때 정하도록 해요. 다행이네요."

"그럼 들어가세요. 오랜만이었어요, 희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