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Long tale

#1

"안대를 벗기겠다. 죄수 D-7088."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순간적으로 눈부신 빛이 망막에 비치자 인상이 찡그려졌다. 병원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신약 시험의 실험체라도 되는 건가…"

나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 잠깐의 욕망만 참았더라면!

남자는 나의 팔을 억세게 잡아끌며 길게 늘어선 일자형 복도를 걷도록 했다. 양쪽에는 키 카드를 통해 열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겠지.

이내 그는 복도의 중간 지점에 멈춰 서서 카드를 통해 하나의 문을 열었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좌측 줄에 있는 문이었다.

"들어가."

남자는 나를 문 안으로 강하게 밀쳤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데. 겉으로는 미소를 짓는 반면 속으로는 욕을 내뱉었다. 방의 내부는 정말이지 감옥과도 같았다. 배게조차 없는 딱딱한 침대, 차가운 벽에 조명조차 달리지 않은 천장. 작은 사이즈의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나마 곰팡이나 거미줄은 없는 것이 다행이다.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로 나의 키의 약 1.5배. 높이는 약 2.5미터정도이다. 크기는 나쁘지 않네. 누워서 지낼 수 있는 게 어디야.

"신입."

다소 경박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옆 방에 사람이 있었구나.

"조금 있다가 신입 설명회가 있을 거야. 준비라도 해."
"고마워요."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그건 그렇고 설명회라니. 요새 병동이나 감옥에서는 그런 것도 한단 말인가.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실었다.

#2

"이곳 SCP 재단에서의 유의사항입니다. 첫째, 절대로 명령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조항은 당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조항입니다. 둘째, 성실히 업무를 수행한다. 이 조항은 당신의 편의를 향상시킬 수 있는 조항입니다. 셋째…"

죄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의 정면에서 연설을 늘어놓는 사람의 말을 듣고는 정신이 멍해졌다. 정말? SCP 재단?

나는 어려서부터 괴기와 오컬트에 관심이 많았다. 그 중 특히 좋아했던 것은 크툴루 신화와 SCP였다. 양측 다 꼼꼼히 설정된 세계관과 흥미로운 오컬트적 요소가 나를 끌여들였기 때문이다.

이제 와보니 꼼꼼한 세계관은 당연한 수순이었구나. 실제 존재하는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겨놨을 테니. 어쩌면 크툴루 또한 실존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 옆에서 전형적인 건달 말투의 사내가 짜증을 부렸다.

"지랄. 안전? 편의? 생각도 없는 말 지껄이기는."
"탈옥이라도 할까?"

이미 서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는지, 서로 떠드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 하지만 연설을 진행중인 사람의 양쪽에 총기로 무장한 사람 둘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큰 소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
"저건 죽여도 되는 건가? 죽여? 여? 갈? 구에?"
"타펜이시여…"

또 그들 중 일부는 일반적인 범죄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지, 정상적인 언어활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입니다."

앞에서 연설을 하던, 교수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을 마쳤다.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고 본인들의 할 말만 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되었다.

어쩔 수 없네. 수업에는 나처럼 착한 학생이 한명쯤은 있어야지. 나는 슬쩍 양손을 들어올렸다.

-짝
-짝
-짝

갑작스레 울려펴지는 박수소리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교수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3

"이야. 이거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네?"

예의 그 경박한 목소리가 킬킬대며 말을 걸어왔다. 와, 이 방. 방음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건가? 옆 사람이 내뱉는 숨소리도 들릴 것 같다.

"이봐. 무시하는 거야? 그러지 말고 반응 좀 해줘. 여기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 웃어본 건 처음인데."
"당신은 별로 재밌는 사람같지는 않은데요."
"클. 그것 참 너무하구만."
"그리고 미친놈이라뇨. 말이 너무 심하시네."
"심하다니? 여기 들어온 사람 중에 미친게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나는 짐짓 짜증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면 전 그 적은 편인가 보죠."
"클클클클! 역시 재밌는 놈이야."
"야 이 새끼야!! 네가 이 복도 전세 냈냐!! 아가리 좀 여물어! 잠을 못 자겠잖아!!"

나는 쌤통이라고 고소해하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옆방의 남자는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붙여왔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클클. 마침 내가 아는 연구원한테 네 첫 담당 SCP도 알아왔으니까."

솔깃했다. 내가 담당하는 SCP가 잘못 걸린다면 시작부터 바로 죽게 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관심 없는 척 물어봤다.

"뭔데요?"
"하, 이 친구 참 귀엽네. 삐진 것도 빨리 풀리고."
"…"
" 거 참. 또 삐지지 말어. 좋은 의미였어. 여기에는 눈 한 번 잘못 마주쳤다고 근 반년간 기싸움 중인 죄수들도 있으니까."
"…"
"뭘 말해주려 했더라? 그렇지. 너의 담당 SCP? 내가 듣기론… 575였지 아마?"

SCP-575. 통칭 포식성 어둠이다. 특수 격리 절차나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완연한 어둠 속에서 나타나며, 약간의 빛만 닿아도 사라진다고 알고 있다.

"575가 뭐냐면 말이야…"
"됐어요. 잠이나 주무세요."
"어? 야! 진짜 안 들어도 돼? 너 그러다 후회한다!?"
"너! 내가 목소리 기억했다! 씨발 내일 자율행동 때 뒤졌어!"
"…"

나이스 어시스트. 나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침대에 누웠다. 아, 잘 때 끌어안을 배게 없으면 잠 잘 못 자는데.

#4

"죄수 D-7088. 나와."

어제 이 시설에 들어오는 동안 나를 감시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키카드를 이용하여 방의 유일한 문을 열었다. 남자의 옆에는 과학자 특유의 가운을 입은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이 사람 죄수 맞아요…?"
"맞습니다."
"착해 보이는데…"

역시. 누가 봐도 선량 그 자체인 나인데. 옆 방의 죄수라는 놈은 뭘 봐서 나에게 미친놈이라는 건지.

"따라와."

주황색 죄수복을 입은 나와, 회색 경비복을 입은 남자, 하얀 가운을 걸친 여자가 기나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나에게 SCP-575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SCP-575는 통칭 '구형 엘리베이터'에요. 사용 시 주의사항은…"

한 귀로 흘리고 넘어가려던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에게 물었다.

"구형 엘리베이터요? 포식성 어둠이 아니라?"
"아, 인터넷에 떠돌던 SCP 이야기를 아시던 분인가요?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그쪽과 이쪽은 다른…"
"책임자님."
"네? 아…! 죄송해요. 이 이상은 말씀드리면 안되나봐요."

여자가 당황한 듯 나에게 사과했다. 다른? 다른 세계? 평행우주? 머리가 아파왔다. 나라마다 다른 건가? 아니야. SCP-KO의 어디에서도 구형 엘리베이터는 없었는데?

"당황하지 말아요. 그래서 제가 있잖아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래. 딱히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와 다르다고 해서 큰 영향은 없다. 어차피 나는 위험한 SCP로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도 바꿀 힘조차 없으니.

"들어가기 전에 주의사항은 다시 종이로 전달해드릴게요. 지금은 잘 못 들으신 것 같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가며, 이상한 증기를 뿜는 복도를 지나고 괴상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방을 지난 후, 하나의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의 옆에는 'SCP-575. SAFE'라고 적혀있었다.

#5

나는 속지 않는다. 저 SAFE라는 단어가, 내가 안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역시 알고 계시나 보네요."
"…네?"
"보통은 SAFE라는 글자를 보면 안심부터 하거든요."

SCP 재단에 대해 무지한 자가 쉽게 저지르는 실수이다. 나는 안다. 방에 가둬놓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설령 방에 들어선 나를 찢어발길 존재라도 SAFE등급이라는 것을.

"…네."
"매뉴얼대로만 하신다면 큰 문제 없으실 거에요. 자. 여기 매뉴얼."

여자는 나에게 종이를 넘겼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세요. 밖에서는 시간이 없으니."

여자가 다른 곳으로 종종걸음으로 이동하고,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하좌우가 단절된 정육면체 모양의 약 10m×10m×10m 크기의 금속 큐브가 보였다. 경비는 나에게 카메라를 넘겼다.

"들어가."
"잠시만요. 심호흡 좀 하고요."

미지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오컬트와 괴기를 즐겼던 것도 현실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들어가."
"아, 거 참 성격 급하시네. 진짜."
"들어가."

그는 억지로 버티던 나를 기어코 엘리베이터의 앞까지 데려갔다. 경비는 엘리베이터의 '올라가기' 버튼을 눌렀다. 이내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엘리베이터와 다를 게 없었다.

"들어가."
"기계에요? 그 말만 하게?"
"들어가."
"아, 들어간다고!"

나는 짜증을 내며 엘리베이터 내부로 진입했다. 이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구형 엘리베이터. 이름 참 잘 지었네. 옛날 엘리베이터처럼 금속 재질의 버튼에, 누르면 붉은 등이 들어오는 구조같다. 우선… 매뉴얼. 매뉴얼을 읽어보자.

1. 8층 버튼과 10층 버튼을 동시에 누르세요.
2.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면, 내리지 말고 문의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3. 엘리베이터가 닫히지 않는다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숨을 참으세요.
4. 본 매뉴얼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8번 조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춘다면 상단의 판에 만원 문자가 뜰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으세요.
5. 9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면, 내리지 말고 문의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6. 엘리베이터가 정전이 된다면 지급된 카메라의 적외선 촬영 기능을 사용하세요.
7. 정전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본다면 정전이 해제될 때까지 그것을 시선에서 떼지 마세요.
8. 본 매뉴얼에는 종교상의 이유로 4번 조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춘다면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9.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에 귀 기울이세요. 그것을 보고하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10. 엘리베이터가 멋대로 움직인다면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까지 움직이지 마세요.

…뭐요?

#6

옛날에 학교를 다닐 때 들어봤던 괴담이다. 한 맨션에 입주하는데 매뉴얼을 지급했는데, 그 매뉴얼에 이상한 조항이 존재했다는 것.

헌데 그것이 어째서 지금 나오는 거지? 그 여자가 나에게 장난을 친 것인가? 아니, 장난은 아닐 것이다. SCP 재단이 설정만이라도 인터넷에 떠돌던 그것과 일치한다면, 의미 없는 헛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사이, 엘리베이터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

잠시만, 엘리베이터가 멋대로 움직이면 어떻게 하라 했지?

10. 엘리베이터가 멋대로 움직인다면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까지 움직이지 마세요.

엘리베이터는 이내 9층에서 멈췄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차가운 석재 바닥을 비추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는 어떤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5. 9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면, 내리지 말고 문의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그래. 위험한 모험은 질색이다. 나는 어둠을 슬쩍 쳐다보고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은 순순히 닫혔다.

1. 8층 버튼과 10층 버튼을 동시에 누르세요.

나는 8층과 10층 버튼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동시에 눌렀다. 버튼에 붉은색 등이 들어오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의 위에 존재하는 패널에 숫자가 아닌 이상한 문자가 나오기 시작한 순간,

엘리베이터 내부가 암전됐다.

#7

한 치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의 전신을 감쌌다.
나의 팔다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는 것이 엘리베이터의 후면인지, 정면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숨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미지의 SCP가 나를 살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칼을 든 채로 웃고 있는 사내가 나를 찌를 것이다.
어둠 속에서 괴기스럽게 웃고 있는 아이가 나를 찢어발길 것이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발뒤꿈치가 무엇인가에 닿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뒤로 뻗어보았다. 벽이었다. 차가운 유리벽. 양 손을 벽에 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끄러지듯 앉았다. 숨이점점차오른다. 내눈앞에있는것이나의손인지발인지SCP인지칼을든사내인지어린아이인지모르겠다손을돌렸다팔을휘둘렀다다리를휘적였다지금나의다리에걸리적거리는
…카메라.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히던 잡생각과 공포를 몰아냈다.
카메라를 꺼내어, 측면을 더듬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적외선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보인다.
흑백의 화면을 통한 화면이지만 보인다.
속으로 격렬하게 환호했다.
카메라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한 사내가 엘리베이터 외부에서부터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전신이 하얀 사내가. 관절이 하나씩 더 존재하는 듯, 앞뒤로 좌우로 기괴하게 팔다리가 꺾인 남자가 천천히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7. 정전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본다면 정전이 해제될 때까지 그것을 시선에서 떼지 마세요.

기억난다. 시선을 떼지 말라고 했지. 남자는 나에게 다가오던 그대로 멈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다가오는 듯 한 느낌이다. 눈을 깜빡일 수록…
…혹시, 시선을 떼지 말라는 말이 눈을 깜빡이는 것 또한 하지 말라는 의미였나?
이런 씨발. 생리현상을 어떻게 하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최대한 남자를 시선에서 떼지 않도록 노력했다. 부릅 뜬 눈은 충혈되어 눈물이 고였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말라고.
나의 노력에도 눈은 깜빡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윽고 남자는 열려있는 엘리베이터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남자는 얼굴이 녹아내렸다가, 눈 코 입이 무작위 위치에 생성되고, 다시 녹아내렸다. 코의 위에 눈이 생성되었으며, 입의 안에 코가 생성되었다. 눈이 한 개가 되었으며, 코가 여섯 개가 되었고, 입이 열 개가 되었다. 관절을 무리해서 꺾는 듯 기괴한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오지 마.우두둑
우두둑안압이 강해져 피눈물이 흘러나왔다.우두둑
오지 마 이 개새끼야!!!
우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둑
남자가 엘리베이터 내부에 발을 내딛으려는 그 때.
불이 켜졌다.

#8

눈에는 피가 고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눈가의 피를 소매로 닦아내고 앞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허깨비였다는 듯, 이미 닫혀있는 엘리베이터의 문만이 나를 가지고 논 것 마냥 처음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허억… 허억…"

눈을 뜨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인지 숨조차 멈추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온 몸이 산소를 갈구했다.

"하아… 하아…"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해갔다.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다음 매뉴얼을 따라야 한다. 저 좆같은 괴물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괴상한 문자를 나타내는 층으로부터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결국 4층에 멈춰섰다. 문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4. 본 매뉴얼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8번 조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춘다면 상단의 판에 만원 문자가 뜰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으세요.
8. 본 매뉴얼에는 종교상의 이유로 4번 조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춘다면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누르세요.

허, 이런 망할.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다. 나는 잠깐의 고민 후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이내 적외선 모드가 켜져있는 카메라를 통해 열려있는 엘리베이터 바깥을 살펴봤다.

나는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어둠 너머에서는.

정전 때 봤던 남자들이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생각과 판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괴물과 엘리베이터에서 불편한 동거를 했을 거라 이 말이지.

이런 망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남자 둘이 한 데 섞여 팔이 여덟 개가 되었으며, 한 남자의 얼굴에 큰 입이 생성되자 옆 남자를 먹어치워 덩치를 불렸다. 관절이 완전히 꺾인 팔다리가 뒤엉켜 여러 남자들이 넘어지면 그들을 짓밟고 새로운 남자들이 달려나왔다.

뭐? 만원 문자가 뜰 때까지?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분을 못 이긴 채로 유리벽에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주먹이 살짝 깨져 피가 배어나왔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오른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왼손 검지에 묻혀 매뉴얼에 글을 적었다.

11. 다 좆까. 이런 개같은 매뉴얼.

입술을 비집고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왼손으로 적어 엉망진창인 글. 화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옆 방 아저씨 말대로 나는 미친놈인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낄낄거렸다. 그런 나의 귓가에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목소리로.

"아쉽네."

그것이 끝이었다. 고개를 소리가 돌린 방향으로 돌렸지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통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닥쳐 미친년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나는 다시 웃음을 참지 않았다. 이번엔 엘리베이터 외부에 들릴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여자가 속삭인 이후로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갔다. 단 1초만. 문이 열리자 방에 들어오기 전에 보였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이내 생각해냈다. 엘리베이터가 격리되어있는 곳이 10m×10m×10m의 큐브 내부였다는 것을.

"만나서 개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허탈함과 함께 중얼거렸다. 들어가기 전 나를 안내했던, 기계와도 같은 경비를 보자 본능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사람이다. 사람이야.

그는 힘으로 나를 떼어내고 말했다.

"떨어져라."

떼어놓고 떨어지라고 말하다니. 짜식, 부끄럼 타긴. 뜨뜻 미지근한 시선으로 경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하얀 가운을 입은 예의 그 여성이 나에게로 다가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헐. 뭐야. 살아나왔네요?"
"뭐요?"
"아니, 솔직히 생존률 저조한 실험이라고 상부에서 반대했는데 프로젝트 책임자분께서 밀어붙였거든요."

여자는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멀리, 50대 후반의 아줌마가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년이?

#9

하얀 가운의 여자에게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에 간단히 대답한 후에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엿을 날렸던 것까지 설명해줬을 때 그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었던 것이 기억났다. 공감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댔냐?"

옆 방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발음은 왜 그래요?"
"마자서"
"아, 어제 그 사람한테요?"
"어."

나는 소리를 죽여 큭큭 웃었다. 그래도 발음이 샐 정도로 맞다니. 약간 불쌍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저씨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어댔냐?"
"어땠냐니… 존나 무서웠죠. 눈에서 피도 나고, 괴물도 쫓아오고… 그걸 괴물이라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오… 그래혀?"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냥 사라졌어요."

남자는 김이 샌 듯 '뭐야.'라고 짧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내일도 맞았으면 좋겠다고 빌며 침대에 누웠다.

젠장, 끌어안을 배게라도 달라고 요청해야 하나.

#10

이 시설에 온 셋째 날이 되었다. 아저씨에게 설명을 들어보니 SCP에게 가는 경우는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시설에 들어온 첫날부터 SCP에게 간 것은 내가 처음이었단다.

그 때 여자가 설명해준 내용도 그렇도, 나는 버림말로 쓰려 했던 거구만?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리고 첫째 날 밤에 한 남자가 스쳐 지나가듯 언급했던 자율행동 시간도 겪어봤다. 상당히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허용을 받고 헬스를 할 수 있었으며, 오프라인용이지만 태블릿으로 게임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목소리로만 들었던 옆 방의 아저씨는 예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깔끔한 미중년이었다. 죄수복을 입은 채 우측 뺨이 부어올라있던 것만 빼면 배우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남자는 식판을 들고 나에게 걸어왔다.

"여. 딱 상상한 대로의 모습이구만."
"상상한 대로라뇨."
"기생오라비같아."
"잘생겼다구요? 저도 알아요."

남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옆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한 술 떠 옆의 소고기무국에 휘휘 저었다.

"그래, 불면증같은 건 없고?"
"네."
"처음 그런 것들을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놈들이 많거든. 정신오염도가 심해지면 뭐, 기억을 삭제해주기는 하는데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야. 신입 설명회에서 보이던 정신 이상한 놈들은 기억을 잃고 다시 설명회를 듣는 놈들이 대부분이거든."

설정에서 본 내용이다. 기억 조작 관련 부서도 따로 존재한다고 들었다. 남자는 숟가락을 빠르게 놀려 식판을 빠르게 비웠다.

"커어~ 아무튼 재밌는 놈이 들어왔으니까, 최대한 몸 사리면 좋겠어서."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아무튼."

남자는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여기 있다 보면 웃을 일이 그만큼 적으니까.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지."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식판을 배식대 옆에 갖다놓고 그대로 가버렸다.

가치라…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그것 참 기분 좋구만.

#11

두 번째 SCP는 시설에 진입한 지 일주일이 지나기 하루 전에 만날 수 있었다. 30대 후반의 남자가 흰 가운을 걸친 채 수염을 긁적이며 나에게 SCP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SCP-226은 '관심종자'라고 불려요. 그에게 관심을 주지 마세요. 절대로."
"네. 아, 저처럼 일주일에 두번이나 실험에 참가하는 D계급이 따로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네요."

망할. 누군가의 음모가 틀림없다. 첫날에 박수로 강사 꼽 줬다고 복수하는 건가?

"관심종자… 그냥 짧게 관종이라고 하죠. 관종은 유클리드 등급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남들에게 보이고자 해요. 일단은 인간형 개체입니다."
"일단은…이라뇨?"
"보시면 아실 거예요. 자, 도착했네요."

SCP-226과 함께 EUCLID라고 적힌 패널의 좌측에 신식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나는 전의 구형 엘리베이터가 생각나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타요?"
"네."
"혼자요?"
"그럼 같이 타드릴까요? 어른이 돼서 혼자 엘리베이터 타는 게 무서워요?"

이런 썅… 당신이 내가 겪은 일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나는 엘리베이터 내부로 들어가, 중앙에 섰다. 남자는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나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출까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단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거대한 피에로 얼굴이 나에게로 날아왔을 뿐.

"꺄하하하하!! 놀랐어? 놀랐지!"

…이번 실험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12

"뭐야, 안 놀랐어?"
"…"

D-7088씨. 절대로 SCP-226에 반응하지 마세요. 반응을 한 순간부터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힐 거예요. 당신에게서 흥미를 잃은 순간, 실험은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피에로를 지나쳐 더욱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방 속에 한 어린아이가 보였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삼촌! 이거 봐라! 이거 내가 만든 건데…"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사람의 안구가 적출되어있었다.

"이걸 꽉! 하면…"

-꽈득

아이가 손에 힘을 주자 안구의 유리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피가 섞여 나오는 걸 보니 적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짠!"

아이가 손을 다시 펴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찐득찐득한 무엇인가 보였다.

"이거 보여? 재밌지! 재밌지?"
"…"

나는 아이를 무시한 채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아이가 내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왁!!!!""

머리가 울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것이 불만인지 나의 팔을 꼬집었다. 이런 망할 ||애새끼||가… 팔을 꼬집는 강도가 점점 세져갔다. 이러다간 살점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팔에 피멍이 들었다. 그럼에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함에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장하다, 나.

아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난 듯 콧김을 세게 내뿜었으며, 팔을 위아래로 붕붕 휘둘렀다.

아이의 몸이 다섯 배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가 공룡의 모습으로 변했다. 두 바퀴 정도 빙글빙글 돌다가 크기가 줄어들어 사자의 형태로 변했다. 금색 갈기의 사자가 포효했다. 이내 새카만 구형의 물체로 변했는데, 재질이 마치 액체괴물처럼 흐물흐물했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녹아내려, 방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만약, 뭔가 잘못되어간다 싶으면 여기 쪽지를 드릴 테니 읽어보세요.

너무 일찍 여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가 뒤질 것 같은데.

실험체의 무관심에 따른 SCP-226의 공격성 변화와 변칙상황의 관측
대상: D계급 인원 하나
내용:*
추신: 이 종이는 실험 보고서의 사본이에요. 놀랐나요? 공격성 변화래서? 핫하! 어쩌겠어요! 위쪽 놈들이 시키는데! 살아나오면 그렇게 요청하시던 끌어안을 배게라도 넣어드리죠!

이런 미친…

#13

배게를 넣어준다고? 감사합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이런 미친놈이 정보를 숨겨? 어떤 실험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SCP에 집어넣었다고?

나를 봐줘…
"넌 닥치고 있어!! 형 지금 빡쳤으니까!"
나를…

아차.

봤구나?

검은 액체가 순간적으로 솟아올랐다. 방의 모든 면을 뒤덮고도 액체가 남는지 바닥부터 그것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삼촌, 내가 보여? 나를 봐줘. 재밌게 해줄게.

검은 액체가 순식간에 무릎까지 차올랐다. 지랄! 여기서 죽는다고? 그 쓰레기같은 엘리베이터에서 겨우 살아나왔는데?

히히. 재밌다. 그치?
"이게 뭐가 재밌어!"
재미… 없어…?

액체가 늘어나는 속도가 급증했다. 생각해라. 생각해. 엘리베이터의 매뉴얼 모순을 해결했던 것처럼, 해답을 찾으란 말이다!

삼촌. 다른 재밌는 걸 가져올 테니까 가지 말아줘…

그에게 관심을 주지 마세요. 절대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망할 연구원 자식.

그가 당신에게 흥미를 잃은 순간. 실험은 그 때 시작됩니다.

나는 이전에 생각한 바 있다. 설정만이라도 인터넷의 그것과 일치한다면, 장난같은 것은 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도 실험에 있어서.

액체가 턱 밑까지 차올랐다.
날 봐줘. 어째서 날 보지 않아요?

그래.

연구원은.

액체가 나를 완전히 가두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표정을 풀었다.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 위해.

그가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인 양.

평온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인 양.

이 방에 나만이 존재하는 것인 양.

나는 연기를 시작했다.

숨이 점점 막혀오고

생각도 점점 느려진다.

사고가 둔화되는

그 와중에도

나는

평온한

표정을

연기하며

…야.
…잖아…
또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는 여기에 있어…

멀리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둔화된 사고가 점점

제 능력을 되찾아가고.

참고 있었던 숨을 몰아서 쉰다.

"허어어어억!"

어느 정도 숨을 참은 거지? 모르겠다. 눈에 들어간 검은 액체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검은 액체에 찝찝함을 느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정신을 차린 채로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14

삼촌. 삼촌?

나는 돌이다. 나는 석상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삼촌 바지 지퍼 열렸어.

나는 노출증 환자다… 지퍼가 열려있음에 기쁨을 느낀다…

삼촌…?

나는 삼촌이 아니다… 잘생긴 형이다…

나는 약 30분간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이는 폭력적으로 변하여 나의 뺨을 후려치기도 하고, 고양이로 변하여 나의 무릎 위에 누워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버텨냈다. 스님을 데려오더라도 이처럼 자제력이 뛰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그대로 30분이 더 지나자,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놓여있는 시체의 팔을 잡아뜯고, 다리 근육을 멋대로 엮으며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이전에 보여준 안구 또한 저곳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내가 그에게 관심을 계속 주었다면 저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겠지.

아이는 시체의 손에 구멍을 뚫고 멀쩡히 남아있던 하나의 눈을 그곳에 쑤셔박았다. 다리의 근육을 팔 주위에 둘러쌌다.

얘들아,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었어
그런데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

아이는 팔을 좌우로 흔들며 인형놀이를 하듯 혼잣말을 이어갔다.

나를 보면서도

아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꽈득

못 본 척을 하더라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감은 채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너희는..
왜 대답을 안해?
너희도날무시하는거야?

아이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제발날봐줘날무시하지말아줘나는여기에있는데어째서날봐주지않아?

아이가 시체의 눈동자를 자신에게 맞추었다.

나를…
봐줬구나…?

아이가 나를 집어삼켰던 검은 구체로 변했다. 아이의 손에 고정된 눈동자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구체는 안구를 집어삼켰다. 구체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내부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거칠게 숨을 쉬더니 아이를 보고는 절망에 빠졌다.

"또… 또야…? 꺼져 할 애새끼야!!"
날 그렇게 봐 줘…
"흐어억!! 그냥 날 죽여줘!! 거기!!! 거기 너!! 날 살려줘!! 제발!!"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도와. 저기에 대답하면 또 구체에 갇힐 수도 있다. 저것이 사람인지, SCP의 일부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아?

또 나랑 놀자… 즐겁지?
"으허… 으허허! 으허허허허허허허허허!!!!"

아이가 남자의 팔을 꼭 쥐었다. 남자는 실성한 듯 광소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내 남자의 팔이 통째로 뜯겨나갔고, 하늘로 피분수가 튀었다.

…저건 SCP의 일부이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입술을 잘근 씹고 엘리베이터 내부로 발을 내딛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5

"명줄이 질기시네요!"

뭐 이 새끼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연구원 남자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내가 떫은 표정을 짓고 있자 남자가 해명했다.

"하하! 시비 거는 건 아니에요. 위엣 분들 중에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이 있나 본데요? 무슨 짓을 했길래 D클래스로 들어오신 거에요?"
"비밀이에요."
"비밀이 많은 사람은 인기가 많은 법이죠!"
"…"
"이런, 무시인가요?"

옆 방의 남자와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연구원이었다. 전과자인 사람 만나자마자 '초면에 죄송한데, 무슨 범죄를 저지르셨어요?' 하면 기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제 방으로 돌려보내주세요."
"이런, 일단 좋은 소식 하나와 몹시 안 좋은 소식 하나를 들어보셔야 해요."
"뭔데요?"

불안감이 엄습했다. 보통 이럴 때는 할 일이 더 남아있거나, 할 일이 더 남아있거나,

"오늘 SCP를 하나 더 만나보게 되실 예정이랍니다!"

…존나 힘든 할 일이 더 남아있거나.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잖아요!"
"뭔데요…"
"끌어안는 배게의 승인이 났답니다!"

힘이 쭉 빠졌다. 나의 생명 수당은 끌어안는 배게였다.

#16

"하아… 그래서 뭔데요."
"수긍이 빠르시군요! 역시 두 번이나 위험 SCP에서 살아남으신 분이십니다!"

이 남자… 성격 이상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을 것 같다.

"자주 듣습니다!"

이런, 생각으로만 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이번에 당신과 함께 할 SCP는…!"

그는 기대된다는 듯 팔을 위아래로 붕 흔들었다.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기대감과 함께 날 쳐다봤다.

"축하드려요! SCP-119에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크흠. 반응이 너무 매정하세요. 아무튼 뜨거운 거 좋아하세요? 이게 SCP-119로 명명된 계기가 있었는데,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하다 발견된 SCP여서 그렇다고 해요. 특히 그 때 가장 큰 불길을 제압하던…"

이런, 투 머치 토커였나. 이런 부류는 단호히 말을 끊지 않으면 말이 영원히 이어진다. LA에 간 경험이 나오기 전에 끊어버리자.

"본론만 말해주세요."
"그러죠! SCP-119는 화염 형태의 SAFE 개체예요. 다들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불리죠. 당신은 불 속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하면 됩니다."

불 속에 들어가…? 이것저것…?

"저… 너무 줄이셨는데요."
"아, 그러면 조금 길게 해볼까요? 제가 LA에서 소방관 친구를 만났는데 말이에요…"

…한 발 늦었구나.

결국 요약하자면 SCP-119는 관측자의 상상에 따라 온도를 달리하는 화염이다. 관측자가 태양보다 뜨거운 불이라고 인식하면 실제로 그리 되는 것이며, 시원한 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그리 되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은 하나이다. 불을 끌 수 있는 방법를 찾는 것. 물이든, 드라이아이스든 지원을 해주겠다는데, 솔직히 그런 걸로 소각이 가능했다면 이미 SCP-119는 해명된 등급이었겠지.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라는 뜻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위의 설명을, 단 3분이면 될 설명을 한 시간에 걸쳐 들었다는 것이다.

말 많은 연구원. 너는 앞으로 박찬호라 부를 것이다.

#17

남자와 나는 사실 약 20분 전부터 격리실의 근처에 도착해있었다. 남자가 말을 계속 하고 싶어해서인지, 근처를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다리 아픕니다."
"입은 안 아프세요?"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상냥하신 분이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제 친구 중에도 상냥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 친구가 마침 조금 전에 말했던 LA에서 만난 소방관입니다! 친구가 말하길, '인류는 태초부터 불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내어 진화를…'"

젠장.

"들어가보겠습니다."
"앗, 바로 가시는 건가요? 제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주신 분은 처음이에요! 또 만나요!"

…제발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남자와 헤어진 이후로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꾹꾹 눌러댔다. 오늘은 옆 방 남자랑 대화조차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돌아가면 바로 침대에 누울 것이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SCP-119, SAFE라고 적혀진 패널을 지나쳤다.

심신이 피곤하다.

SCP-119는 바깥으로 열도 빛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빛의 흡수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이르는 특수 물질 내부에 격리되어 있었다. 나는 SCP-119의 격리 구역 내부로 들어갔다.

새빨간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타인이었다면 본능적으로 겁을 먹고 '뜨거울 것이다'라 지레짐작 했겠지만 나는 그럴 리 없지.

…너는 내 에어컨이다.

마침 후텁지근했는데 잘 됐군. 시원한 불꽃이라! 여름에도 보는 맛이 있겠고, 상품화하여 팔아도 흥행할 것이다.

나는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미소지었다. 온도도 딱 좋고, 몸이 피곤하니… 잠이 오는구만. 내 방에 돌아간다면 배게가 날 기다릴 것이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자고 싶은데.

나는 덮쳐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채로 눈을 스르륵 감았다.

#?-)(*+~

"엄마는 왜 오른다리만 좋아해?"
"무슨 소리야! 항상 편히 있는 건 너면서!"
"나도 자주 쓰이고 싶단 말이야!"

한 여자가 본인의 양 다리가 다투는 괴이한 모습을 지켜보는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
"우리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구나!"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우리를 먹어서, 둘 다 몸 속에 있는 거야!"
"영원히!"

양 다리가 여자의 허리로부터 떨어져 나가 여자의 입을 벌리고 들어가려 애썼다. 여자의 작은 입은 다리를 수용할 수 없었고, 입이 찢어짐에 고통을 느낀 그녀는 필사적으로 팔을 통해 도망치려 했다. 오른팔을 슥 앞으로 내밀어 땅을 짚고, 땅을 밀어내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때 왼팔이 말했다.

"엄마는 왜 오른팔만 좋아해?"

#18

잘 잤다.

나는 불꽃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불을 끌 수 있는 방법? 뭐, '노력해봤지만 안 되더라구요.' 하면 어쩔 건데.

나는 낄낄대며 방을 나섰다. 곧바로 시야에 두 명의 D 계급이 보였다. 옆의 연구원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한동안 나오질 않으니 죽었다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연구원은 똥을 씹은 표정으로 (아마 나를 싫어하는 높은 인간의 졸개인가보다.)D 계급 둘을 방금 내가 나온 방의 내부로 들여보내려 했다. 생각해보니 관측자가 둘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관측자가 없다면 변칙 상황 없음. 하나라면 관측자의 상상대로. 둘이라면…?

그들이 방에 들어가자 세상이 떠나갈 듯한 굉음이 들렸다. 무뚝뚝한 경비원들마저도 귀를 막아버렸다. SCP-119를 감싸던 특수 물질은 이상이 없었지만…

"내부 인원은 다 죽었겠지."

SCP-119를 둘 이상이 함께 바라보면 죽는다. 기억해두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안내해주는 가드와 함께 나의 스위트 홈으로 돌아갔다.

#19

나는 적으면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하루에 두 번 정도 SCP의 실험에 참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D계급 죄수들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눈빛에 감탄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나도 내가 장하다. 잘했어, 나.

아무도 위로해줄 사람이 없는데 나라도 나를 위로해줘야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채 이제는 꽤나 친해진 경비원과 다음 SCP의 격리실로 이동중이었다.

"경비원님. 이름이 뭐냐니까요?"
"…"
"허, 참 진짜."

…정말로 친해진 것 맞다.

참고로 옆 방 아저씨 또한 꽤나 오랫동안 살아남고 있다. 내가 이 곳에 들어온 이후로, 아저씨와 나를 포함한 몇 명 빼고는 모두 새로운 인원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물론 교체란 전에 사용하던 것의 생명이 다 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언젠가 아저씨에게 물어본 적 있다.

'아저씨는 뭐 잘난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아남아요?'
'너무 직설적이잖아. 마음이 아프다…'
'말 돌리지 말구요.'
'유머! 사람은 웃음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살아남을 수 있다!'
'뭐, SCP한테 농담이라도 했나 보죠?'
'…'
'…농담이죠…?'

그 아저씨의 성격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어느 때고 나에게 충고를 가장한 시비를 걸어오더니, 그렇다고 싸움을 잘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들어가."
"이름이 뭐에요~"
"들어가."
"전화번호 뭐에요~"

나는 흥얼거리며 SCP-003, SAFE라고 적혀있는 방에 들어섰다.

"왓 츄얼 네임 와와 왓 츄얼 네임~"

#20

SCP-003은 인간형 개체였다. 이번 실험의 목적은… SCP-003과 대화를 시도하라? 너무 쉬운 것 아닌가? 정신조작계열인가…?

나는 우선적으로 SCP-003의 모습을 천천히 뜯어봤다. 보통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로 보였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 채,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다가, 주황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좌선 중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번개에 둘러싸인 모습으로도 보였고, 코끼리의 모습으로도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오냐."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들었던 설명에 의하면 SCP-003은 면담의 대상에게 정보를 주는 대신, 소중한 것을 대가로 가져간다고 했다. 기록상으로는 양 눈, 목소리, 기억… 나는 뭐 하나도 잃기 싫은데.

"딱히 얻고 싶은 정보는 없는데, 저한테서 뭔가를 가져가지 말아주실 수 있나요?"
"뭐라? 하하하!"

그가 웃자 천지가 울렸다. 바닥은 갈라져 용암이 솟아오르고, 하늘에서는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냐. 그러도록 하지. 대신 나와 대화라는 것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죠 뭐."

그는 말했다.

"이 방의 내부로 들어오는 주황색 사람들은 언제나 종이에 적힌 물음만을 나에게 읊었지. 지식욕도, 자신의 의지도 없이 그저 읽기만. 나도 마침 누군가와 대화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이상한 엘리베이터에서 살아남은 일. 관종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충고. 시원한 불꽃. 인형 살인마. 30초 이내로 질량이 두 배가 되는 토끼…

그는 흥미롭게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재밌어하기도 하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기도 하며 말이다.

"다른 이야기는 없는가?"
"일단은 이게 끝인데요."
"그것 참 아쉽구만."
"어휴. 제 말을 이렇게 오래 들어주신 분은 또 처음이네요. 지금까지 말을 할 곳도 없었는데."
"나도 불평 좀 하겠네. 사람들이란 나에게 바라는 것 뿐이네. 신이시여, 신이시여…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네. 피를 토하면서도 나를 부르는데, 그저 지켜보는 것만…"

그는 허공을 잠시 멍하게 바라봤다.

"누군가 말했더군. 신은 죽었다고."

나는 푸흡 웃었다. 신이 신의 사망을 논하다니.

"나도 개그라는 것을 할 수 있었군."

SCP-003도 같이 웃었다.

#21

SCP-003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타인과의 대화는 아저씨 이외에는 거의 한 적이 없었기에, 오랜만의 의사소통에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속이 시원해졌네요. 감사합니다."
"뭘, 나 또한 즐거운 경험이었다네."
"하아… 이제 또 다른 실험을 하러 가겠네요.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당신만 담당하고 싶은데."
"이런, 그렇게 된다면 나에게 해줄 말이 점점 떨어져가지 않겠나."
"그야 그렇죠."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올려 낄낄댔다.

"흠… 이 곳을 나가고 싶은가?"
"예? 아뇨.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네요."
"이 방이 아니라."

SCP-003이 하늘을 가리켰다.

"이 시설 말이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요?"
"그렇네."
"무르기 없깁니다?"
"…자네는 신을 무엇으로 보는 겐가."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잠시 나를 쳐다봤다.

"다만, 손가락을 튕겼더니 자네가 사회에 나와있거나, 이 곳에 온 사실이 없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닐세."
"그렇다면요?"
"신은 인간에게, 약간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지."
"네…?"
"대화는 즐거웠네. 다음에 또 보게."

에이. 뭐야. 농담이었어?

나는 실망감을 숨기지 않은 채 터덜터덜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는 SCP-003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22

나는 SCP-003, SAFE라고 적힌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실험 완료됐습니다."
"…"

밖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나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닌가 불안해졌다.

"저기요!?"

문을 크게 두드리기 시작하자 잠시 후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뭐지?"

기계가 오작동을 한 것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밖에서 뭘 하길래 제 말을 그렇게 무시…"

문 앞에는 회색 옷의 남자가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있었다. 만일 남자의 복장이 회색이 아니라 주황색이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D계급들은 하루에 세 명 이내로 죽는다면 많이 살아남는 것이기에.

하지만 회색 옷은 다르다. 이 곳을 지키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총기를 들고 있음에도, 발사한 흔적이 없다. 이는 기습을 당했다는 것이며, 상당한 빠르기로 해치웠다는 것이다.

"저기요! 괜찮아요?"
"…"

괜찮았다면 내가 내부에서 문을 두들길 때 이 사람이 열어줬겠지. 나도 굉장히 멍청한 질문을 했다.

남자의 피는 마른 상태가 아니었으며, 지금도 점점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혈을 해야 하나 맥을 짚었다.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약간의 기회만 줄 뿐이지."

…이게 그 기회인가…? 탈옥을 하라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방금 나온 SCP-003의 격리실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닫혀버린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가드의 몸을 뒤져, 키 카드를 얻어 잠금장치에 대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요. 다음에 한 번 더 보자구요.

나는 키 카드와 총, 탄을 챙긴 채로 경비의 시체가 있던 복도의 문을 열었다.

"꺄하하하하하!!!"

큰 크기로 웃던 주황색 옷의 여자가 내 쪽을 바라봤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누구보다도 도움을 요청하는 그것이었다.

"꺄하… 하…"

여자의 웃음소리가 점점 잠잠해지고, 그녀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터져버렸다.

-후두둑

연분홍 뇌수와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복도의 문을 다시 닫았다.

…지금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신님…?

#23

후-하. 후-하.

좋아. 정신 차렸다. 얼굴의 피와 살조각을 닦아내어 소매가 주홍색이 되었다.

복도의 문을 다시 열었다. 여자의 시체는 여전히 바닥에 있었다. 잠시 애도를 표하고 시체를 피해 옆으로 슬쩍 지나갔다.

회색,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깔끔한 느낌의 시설에 붉은색 무늬가 더해졌다. 차가운 바닥에 내딛는 정해진 규격의 신발굽 소리만이 울린다.

양쪽으로 길이 나고, 일직선으로, 꺾여서, 십자로.
복도를 지나쳤다.
SCP-981, EUCLID. SCP-333, SAFE.
격리실을 지나쳤다.
회색 옷의 시체, 주황 옷의 다량의 시체, 하얀 옷의 시체.
시체를 지나쳤다.

길을 헤메는 것처럼 개미굴마냥 복잡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하나의 복도에 도달했는데,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었다.

옷이 죄수복도, 경비복도, 과학자의 가운도 아니다. 그는 SCP인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

그의 주변에는 타 죽은 시체, 물에 흥건히 젖은 것으로 보아 익사한 것으로 보이는 시체. 사지가 절단되어 아직까지 피분수가 솟구치는 시체까지. 다양한 시체가 쌓여 있었다.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에게 신경을 집중한 채, 복도의 가장자리 측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를 지나치는 순간,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남자는 양 눈이 파여있는 듯 텅 비어있었으며, 양쪽 귀 또한 잘려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우주의 공허를 직접 경험한 자는, 결국 미칠 수 밖에 없답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귀를 막았다.

이 SCP는… 이야기꾼이다.

#24

SCP-073. SAFE등급의 이야기꾼. 그는 자신의 청자가 될 사람이 근처에 있다면 이야기를 시작한다. 청자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거부할 수 없으며, 진행되는 이야기를 직접 겪게 된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청자는 분신으로 죽게 된다. 물 속에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먼 청자는 익사한다. 갖은 고문 끝에 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청자 또한 그리 된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서두에 자신의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인지 암시하는 문장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가 언급한 내용은 미쳐가는 사람.

나는, 점점 미쳐갈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날고 있습니다.`

귀를 막고 있는 양 손을 뚫고 그의 속삭임이 들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벽과 바닥, 천장이 허공으로 바뀌었다. 완전한 어둠. 빅 뱅이 일어나기 전 우주가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공허했다.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몸을 움직여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위도 아래도, 좌우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어떠한 물리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곳은 어디인가. 또 나는 누구인가.

완전한 고요. 소리조차도 공허에 집어삼켜져 나의 심장박동. 침 삼키는 소리. 피 흐르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정말? 나는 사실 숨을 쉬고 있지 않는 게 아닐까? 심장이 사실 뛰지 않는 게 아닐까?

점점 커져가는 외로움에 당신은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상상으로나마 친구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머릿속조차 공허로 가득 찼다.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모든 것이 가득 차버렸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태 속에서 혼자만이 세상 속에 서 있다. 혹은 앉아 있다. 혹은 누워 있을 것이며, 혹은 엎드려 있을 수도 있다.

공허 속에서 당신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갑니다.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해짐을 느꼈다.

나는… 인간성을 잃으면 안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천천히, 암흑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왔다.

#25

사람은 처음에는 흐릿하게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형체를 갖추어가더니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 사람은 나였다.

나는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아침에 강아지가 죽어버렸어

공허 속에 혼자 존재하는 저 사람. 사실 생각하고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아닐까? 사실 저 사람의 생각 속에서, 저 사람 자신의 모습을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두와 함께 하자며 온 가족과 함께 먹어버렸지

강아지는 맛이 있더군!

온 가족도 맛이 있었지!

내가 낄낄거렸다.

나는 점점 인간의 형상을 벗어났다. 턱은 물이 섞인 점토처럼 흐물흐물해졌고, 눈은 절반이 잘린 오렌지로 교체되었다.

당신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갑니다

입은 누군가가 손으로 양 끝을 잡아 들어올린듯 귀에 닿을 정도로 찢어져 있었으며, 몸의 한가운데엔 구멍이 뚫려있었다.

공허했다. 구멍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너를 향해 손가락질했어. '악마의 자식!' '정말로 끔찍해요!'

사람 절반 크기의 인형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울며, 놀라며, 화를 내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가슴의 빈 공간이 쓰레기로 채워져갔다.

하지만 뭐 어때. 난 원래 쓰레기였는걸!

나는 채워져가는 쓰레기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가슴이 아릿했다.

쓰레기를 끄집어내자 어느 새 나는 사라져있었으며, 쓰레기만이 나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쓰레기를 자세히 보자 강아지와 가족들이 그 위에서 행복하게 뛰놀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했다.

그러다 그들은 내 쪽을 보더니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울며, 절규하며, 절망하며 나를 비난했다.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이내 쓰레기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한 사람이 그 쓰레기를 집어들었다. 이내 나에게 던졌다. 그것은 나의 가슴에 뚫린 구멍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하지만 뭐 어때…

나는 원래 쓰레기였는걸.

나의 가슴은 쓰레기로 가득 찼다. 더 이상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나에게선 쓰레기의 역겨운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무 판자를 몸에 대고 망치질을 했다.

몸의 앞뒤로 인간성이 추가되었다. 못은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나는 웃었다.

악취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당신은

눈이 비어있는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인간성을

그는 나무판자를 잡았다.

점점

그리고 팔에 힘을 주더니

잃어갑니다

나무 판자를 있는 힘껏 뜯어냈다.

#26

악취. 미쳐버릴 정도의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이 악취가 싫었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적에 악취에 미쳐버렸다.

냄새가 난다며 코를 자르려고 시도한 적도 있으며, 악취의 근원을 없애버리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본 적 또한 있었다.

하지만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해져 나를 괴롭혀댔다.

나는 악취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덧붙였다. 가면은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가면은 예의바른 사람이었으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면은 비로소 내가 되었다.

나는 행복했다. 악취가 더 이상 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 또한 나에게서 악취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가면에 금이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가져온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빼앗아, 가면의 위에 덧붙인다.

그리고 그 가면은, 지금 누군가가 뜯어갔다.

안 돼.

나는 원래 미쳐있었어.

안 돼. 발.

가면을 가져가지 마.

이 악취의 수렁에 날 빠뜨리지 말아줘.

나는 절규했다.

쓰레기가 나를 비웃었다.

눈물을 쏟아내며 화를 냈다.

나는 칼을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도려냈다.

이제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들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원래 쓰레기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쳐있었다.

공허함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의 가슴에 있었으며

공허를 채우기 위한 발버둥은 나를 악마 취급 받게 했다.

나는 공허를 경험했다고 미쳐가지 않는다.

이미 공허를 경험한 나는

원래 미쳐있었으니까.

주변의 공허가 사라졌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묘한 부유감 또한 사라졌다. 이야기꾼은 만족한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중력에 적응하지 못한 채, 혹은 다시 느껴지는 공허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있었다.

나는 경비에게서 가져온 총을 이야기꾼에게 겨눴다.

-피슉

소음기가 장착된 총의 발사음이 들렸다. 이야기꾼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의 몸이 스르륵 기울어져 쓰러졌다.

붉은 피가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머릿속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미 터져버린 이야기꾼의 머리를 밟고, 또 밟았다.

그러다 문득 속이 메슥거려서 구토를 시작했다. 먹은 것이 없었지만 토는 멈추지 않았다. 산성의 위액이 식도를 넘어 밖으로 튀어나왔다. 목과 입 안이 따끔거렸다.

"우웨엑…"
"허억… 허억…"
"우욱…"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 위장을 재촉하는 역겨움마저 토해낸다.

나를 미치게 만드는 악취를 토해낸다.

나를 붙잡고 있던 그들의 그림자를 눈물로 토해낸다.

나는 미쳤으니까. 이미 미쳐있으니까.

#27

괜찮아… 난 괜찮아…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린다. 뺨이 욱신거린다. 너무 세게 때린 것 같았다.

"후…"

이야기꾼의 시체가 있는 복도를 지나쳐, 다음 복도에서 청승을 떤 지 30분째, 겨우 차게 식은 머리에 안도했다. 하지만 아직 울렁거림이 멎지 않아 구역질 또한 계속됐다. 나는 욕을 내뱉었다.

"개같은 거…"

나는 허리를 들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현재 다량의 SCP가 탈주한 상태입니다. 현재 생존하신 여러분께서는 SCP-226의 격리실 내부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이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저 목소리는, 관종의 목소리일 텐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7mm 총으로 관종을 죽일 수 있는가?

답은 '아니요'이다. 아무런 신체능력도 없는 이야기꾼과는 달리, 관종은 변신이라는 능력이 있다. 내가 그것에게 총구를 겨눈 순간, 자신에게 집중되는 관심을 느껴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래. 관심종자는 내버려 두자.

고위험군 또한 문제가 심각한 듯 했다. 방송실은 고위험군을 지나가야 나오는 사무구역에 있는데, 그렇다면 고위험군 또한 SCP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다.

"인생 진짜…"

신님. 이거 기회 맞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위기같은데?

머릿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라 말하며 껄껄대는 SCP-003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탈출은 해야지… 여기 있다간 개죽음이다…

#28

걷기만 한 지 약 한 시간. 속은 꽤 괜찮아졌다. 걸으면 걸을수록 어째선지 하얀 나비들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색이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힘을 잃은 듯 파스스 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비들이 잠시 뒤로 빠져, 뭔가를 기다리는 듯 하더니 수많은 나비들이 나를 덮쳐왔다.

곤충들이 몰려오는 것에서 생기는 징그러움보다는, 하얀 빛무리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에서 발생하는 신비로움이 더 컸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시야가 하얀색으로 변했다.

눈부심으로 불쾌함이 느껴진다기보단, 순백으로 가득 찬 세상에 신성함이 느껴졌다.

눈을 뜬 순간, 나는 허공에서 나를 관조하고 있었다. 하얀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 검은 존재. 그것이 나였다. 하얀 세상은 나의 유색을 희석시키려 했다.

세상의 무색이 나의 유색과 희석되었다.

회색의 세상이 되었다.

나 또한 회색이 되었다.

하얀 세상이, 검은 나를 바꾸고 싶어했기에 나는 회색이 되었다. 나는 세상에 동화되었다.

아무리 가면을 쓰고 덧붙이고 이어도, 그렇게 원하고 바랬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져 버렸다.
눈물이 스륵 흘러내렸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나의 세상이었다. 세상 속의 나였다.

나의 몸, 정신, 가면조차 회색에 물들었다. 가면을 스윽 벗겨내보았다. 어떤 오물보다 역겨웠으며, 어떤 공허보다 새까맸던 나의 가슴조차 회색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웃으며 즐기는 축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다.

나는 하얀색이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회색의 세상 속에서, 회색인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눈을 떴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

나는 주홍색이 된 죄수복의 소매로 눈가를 슥 닦았다.

좋은 꿈을 꾸었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눈물이 다시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기에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색이 되어 파스스 흩어진 다량의 나비 시체가 보였다. 나는 애도를 표했다.

그들은 '악몽을 먹는 나비'.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을 희석시켜주는 흰색 나비. 누군가의 부정을 먹어, 검은색이 짙어진다.

회색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한 마리가 살아있었구나.

나비가 나의 어깨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사람에게서, 사회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위로를 나비에게서 받았다.

#29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복도의 문을 열었다. 우측 상단에 박혀있는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Mobile Task Force, Gamma-Seven="For High" Designated "Alpha-01, Epsilon-08" Entered the facility. (기동특무부대, 감마-7 "상부를 위하여" 중 "알파-01, 엡실론-08"이 시설에 진입했습니다.)

뭐지? 방송실은 분명 관종이 점령했을 텐데? 그건 그렇고… 기동특무부대! 그래, 내가 알고 있던 세계관에서도 기동특무부대는 존재했다. 그런데 감마-7?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부대명이다. SCP가 다르니 기동특무부대 또한 다른 것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저 MTF가 나를 구해줄 것인가… 이름이 상부를 위하여? 젠장. 나는 상부에 미운털이 박혀있을 텐데.

일단은, MTF도 SCP도 피해서 나가는 것이 최선인가.

한숨만 나온다. SCP만으로도 벅찼는데…

-타당! 타다당!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음에, 연사 소리! 사람? 생존자가 더 있는 건가?

나는 총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꺾인 일자형 복도를 지나, 일자형 복도 여러 개를 관통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방금 막 다친 듯 가슴에서부터 피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손목을 짚었지만 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기요!"
"윽…으으…"
"정신 차려요! 무슨 일이에요!"

옷은 경비의 회색. 얼굴은… 세상에. 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 경비였다.

"자… 잠시만. 구급상자!"

경비의 소지품을 뒤지는 사이에 나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신이 새하얀 마네킹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멍청아! 저걸 쏜 거야!?"
"…"
"안 쏘기만 했어도 살았을 텐데!"

경비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마네킹 또한 경비를 보더니 눈을 감았다.

#30

SCP-798. 통칭 웃는 마네킹.

자신을 쳐다본 사람을 따라온다. 그저 그 뿐이다. 30분간 따라오다가, 아무런 충격이 가해지지 않으면 활동을 정지한다. 다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충격을 가한다면 약 30배의 충격으로 돌려주는 SCP.

…멍청이가.

내가 계속 격리실에 들어가는 걸 보면서 공부라도 하지. 내가 SCP에 대해 떠들면 듣기나 하지.

나는 경비를 바로 눕히고 애도를 표했다. 이름조차 아직 모르는 경비에게.

나는 마네킹을 흘끗 쳐다봤다. 그것은 어느 새 눈을 다시 뜬 채로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재수없는 새끼…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마네킹에 휘두르려 했지만 이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나만 아플 뿐이다.

나는 마네킹을 근처의 테슬라 게이트로 데려갔다. 마네킹은 나의 뒤로, 약 3m의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테슬라가 작동된 후, 나는 재빠르게 그것을 건너 3m가량을 이동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마네킹은 테슬라 게이트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쳐다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잘 가라.

-파지직!

마네킹은 고압 전류를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새까맣게 타버린 마네킹 특유의 재질이, 내 발치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잠시 쳐다보다, 뒤를 돌아 그대로 뒤를 걷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에요…"

한숨을 내쉬었다.

#31

-저벅저벅
-뚜벅뚜벅

나의 발소리 외에,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린다. 구두굽 소리로 추정되고, 나와의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 것을 보니 나에게 들키면 안 되는 존재.

나는 의도적으로 테슬라 게이트에 도달했다. 테슬라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콰지직

섬뜩한 전기 소리가 난 직후, 테슬라를 건너갔다. 곧바로 뒤를 돌았다.

"이런.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한 30분 전부터…"
"처음부터로군. 참으로 흥미로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울상을 짓고 있는 가면을 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눈과 입에서는 질척질척한 검은색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SCP-035…?"
"이런, 나를 알고 있나?"

가면이 씨익 웃었다.

"아니, 당신은 없을 텐데… 아니, 없는 게 아니라…"

혼동이 왔다. 내가 겪은 SCP들과 내가 읽은 SCP들을 구분지으며,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건만, 내가 읽은 SCP 중 실존하는 SCP를 확인하니 그들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혼란스러운 모양이구만. 시간이 된다면 당신 세계의 SCP-001이나 확인해보지 그래."

001…?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SCP-001은 최고 기밀로 분류되어, 웬만한 사람들은 확인조차 할 수 없을 텐데.

"흐으… 쓸 만한 몸이야. 쓸 만한 머리에. 아주 탐나는구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확실히 SCP-035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를 참지 못하는 존재. 그러나, 나를 대하는 그의 몸짓에는 자제력이 실려있었다.

"아… 안 되지 안 돼."

그는 양 손으로 반대편의 팔을 잡았다.

"일단… 사무실까지만 오면 우리가 책임지고 탈출시켜주지."
"…어떻게 믿고?"
"나를 알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가?"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이미 몸이 썩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알았습니다."
"옳지. 착한 아이로군."

그는 테슬라의 건너편으로 유유히 넘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상부를 위하여…"

#32

상부를 위하여…? 혹시 이 시설에 진입한 기동특무부대…? 그곳에 SCP-035가 소속되어 있다고…?

아니. 억측이다. 단지 저자의 윗선을 위함일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고위험군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고위험군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나의 눈 앞에 있다는 것.

나를 기준으로 양쪽에 엘리베이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공문이 붙어있었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는 구형 엘리베이터! 이미 한 번 구형 엘리베이터를 돌파한 그대를 위해서 한 층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번에도 매뉴얼은 존재하니까요!

…지랄맞네 진짜.

매뉴얼은 엘리베이터 내부에 탄다면 지급해주겠지. 생각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 싫으니까.

나는 일단 양쪽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도착한 두 엘리베이터. 내부의 모습은 양쪽 다 똑같았다. 고개만 슥 내밀어 버튼 부분을 확인해보아도,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해 보자 이거지.

나는 왼쪽 엘리베이터 내부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닫힌 엘리베이터의 문에 매뉴얼이라고 적혀있는 글을 읽으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내부가 암전되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저번에 엿을 날려서 감정이라도 생긴 건가?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악의가 느껴졌다.

나는 가지고 있던 7mm 총의 조준경 부분을 눈에 가져다 댔다. 야간 투시경이 장착된 총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열려있었으며, 저번에 봤던 하얀 남자가, 나를 덮쳐오는 중이었다. 불과 1m도 채 남지 않은 거리.

너무하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큰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고꾸라졌다. 머리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찾아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여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불이 켜지고, 문이 닫히는 구조인 것 같았다.

나는 조준경을 통하여 엘리베이터의 바깥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33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베이터 또한 멈춰 있기에 완벽한 무음의 상태 속에서 낸 소리는 상상보다 컸다.

나는 문의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엘리베이터의 빛에 의존하여 근처를 더듬거렸다.

…벽? 이렇게 좁다고?

숨소리에 미세하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참았다.

-두근
-두근
-우우웅
-두근

들렸다.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이 방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다이빙했다. 엘리베이터는 이내 문을 닫았으며, 불 또한 점등되었다.

…한 발만 더 늦었어도 저곳에서 납작해졌겠지.

그렇다면 하얀 남자 또한 저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내 쪽으로 온 것인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뉴얼은 어느 새 찢겨나간 상태였다.

"…매뉴얼이 존재하긴 하는구만."

나한테 보여주지 않을 뿐이지.

엘리베이터는 4층에 도달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닫으려다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이전 보았던 문구가 생각났다.

이미 한 번 구형 엘리베이터를 돌파한 그대를 위해서 한 층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라고.

나는 닫힘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조준경에 눈을 댄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하얀 남자의 입이 보였다. 쩌억 벌어진 입이.

입의 안에는 코가 있었다. 코의 표피에는 눈이 세 개 달려있었으며, 그 코가 수십 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남자를 겨눴다.

-탕

투명한 체액이 나에게 흩뿌려졌다. 상당히 역한 상황이었음에도 참아 넘겼다. 주위를 더 훑어보았지만, 더 이상의 남자는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만약에 총이 없었다면, 정전 때는 보이지도 않는 하얀 남자가,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상태로 입구를 눈이 터져라 응시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방금은 남자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인하고, 다시 들어와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나의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로.

"치사해."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닥쳐 미친년아."

#34

엘리베이터의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상단의 패널에는 "Heavy Containment Zone"이라 적혀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좀비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좀비 여럿이 머리카락이 있는 좀비를 물어뜯고 있었다. 수는 양 측이 비슷해보였지만, 한 쪽은 통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손님인가?"

갑자기 들려오는 기계음 섞인 남성의 목소리에 뒷걸음질 쳤다.

"놀래키려 한 것은 아니네. 미안하군."

…역병의사. SCP-049. 하얀 까마귀 모양의 가면에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외형의 SCP. 분명 시설에 진입하기 이전, 읽었던 SCP 세계관에 존재했던 SCP이다.

"당신은 어떻게… 아니, 이건 됐습니다."
"흐음… 가면을 만났나 보군."
"아…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어. 그 친구가 불친절하긴 해도 할 말은 하거든."
"…그가 저에게 한 말이라곤 SCP-001을 확인해봐라. 사무실까지 와라. 이 둘 뿐입니다."

역병의사가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쳤다.

"…나중에 단단히 사상교육을 해야겠구만."

그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일단 나를 따라오게."
"어디를 가는 거죠?"
"밖으로."

그는 특유의 구두굽 소리를 내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설명은 걸으면서 듣지. 아, 혹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싫어하는 편인가?"
"아뇨.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

그가 웃었다.

"당신 세계의 SCP-001은 '다차원 여행기계'라네. 이름만 들어도 눈치챌 수 있듯, 여러 차원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기계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그래! 이 차원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부터 왔다네! 대단하지 않은가? 어떤 곳에서는 대재앙이 도래하지 않기도 했으며, 어떤 곳은 나의 치유를 극도로 필요해 하기도 했지! 아, 그 세계는 정말이지… 천국이었어…"

그가 걸음을 멈추고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미안하네. 즐거운 꿈에 빠져버렸구만."

그는 이내 나에게 사과를 건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워어!!!

보라색 피부의 파충류가 역병의사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로브의 소매에서 메스를 꺼내더니, 파충류의 목 아래, 한 지점을 푹 찔렀다. 파충류는 소리 없이 쓰러졌다.

"여러 차원의 SCP. 말만 듣는다면 이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 물론 나도 그 중 일부이지만 말이네."

그는 파충류를 잘라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파이프와 액체를 여기저기 끼워넣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다차원에 포진한 인재들 또한 있다는 것이지. 우리는 그들을 섭외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 중이고."

파충류가 좀비같은 소리를 내며, 한결 느려진 속도로 우리가 지나친 길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전투 소리가 커졌다. 역병의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수번호 D-7088. SCP 실험 투입 132회. 성공률 87%. 모범 죄수 선정 3회. 당신이 맞겠지?"
"…일단은 맞습니다."
"일단은…?"
"마지막으로 SCP-003과 한 실험은 기록되지 않았겠죠. 실험 투입 133회. 성공률 약 88%로 수정해주세요."
"하하하! 이것 참 유쾌한 친구로구만!"

역병의사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SCP-001. 다차원 여행기계가 발견된 이후로 모든 세상의 SCP-001은 다차원 여행기계로 하기로 했다네. 또한 여러 차원에 존재하는 자원, 물자, 인재 등을 통하여 SCP들을 재단의 진영에 포섭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 포섭된 SCP들을 중심으로 타 차원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동특무부대. 그것이 우리, '상부를 위하여'."

역병의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단의 전력이 된 것을 환영하네. 제군."
"…그렇지 않는다면요."
"죽어야지. 뭐. 어쩌겠나."

나는 피식 웃었다.

"선택권이 없군요."

역병의사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스윽 웃었으며, 나도 그를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신님, 기회가 맞았나 봅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