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할 수 있어요."
이 말만 믿고 나는 지금 수술대에 누워있다. 수술실에 들어오면서 플라스틱이 썩는 냄새가 났다. 아니 실리콘이 썩은 냄새이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내가 여태까지 맡아본 적 없는 역한 냄새가 났다. 차라리 마취라도 얼른 시켜주지면 좋으련만, 의사는 커녕 넓은 수술실에 인기척 하나 없었다. 혹시 내가 속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특히 수술 장갑이 눈에 띄었다. 흔히 보던 하얗고 잘 안 찢어질 것 같은 수술 장갑이 어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게다가 혼자서, 그것도 맨 손으로 들어왔다. 의사가 내 앞에 다가와 말했다.
"일단 폐에 있는 암덩어리부터 빼냅시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 틈도 없이 의사의 손이 내 입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손이 입 속에 들어왔다. 계속 들어갔다. 목구멍 안에 들어있다. 말하고 싶지만 내 혀는 의사의 팔에 눌려있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목 안은 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멈칫했다. 손가락을 가닥거렸다. 손가락이 한쪽 방향으로 향했다. 그대로 손이 들어갔다.
기도 속이다. 억지로 구멍을 넓혀가면서 손을 넣고 있다. 손이 완전히 막혔다. 이제 더 이상 못 들어간다. 더 이상 안 들어간다. 그러자 폐를 움켜쥐었다. 폐를 흔들었다. 폐를 짜냈다. 폐를 닦아냈다. 폐에서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 것을 때어내고 손이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의사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 것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천천히 내 기도에서 손을 빼냈다. 더욱 조심스럽게 내 목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손을 빼내자 검은 덩어리가 의사의 손에 들려있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더럽혀진 장갑을 벗고 있었다. 저 의사로부터 빠져나와야 할 것 같았다. 저년이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의사가 다시 나타났다. 의사는 어느새 깔끔한 새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잘 참으셨어요"
의사가 말했다.
"이제 뇌에 있는 종양만 제거하면 돼요."
그리고 의사는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내가 어쩌다가 21세기에 제작된 스마트 오나홀을 얻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과정이 합법적인 과정이었으며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만 알아뒀으면 좋겠다. 처음 이 물건을 얻었을 때 나는 단순히 이런 저런 잡다한 기능을 붙여놓고 스마트 기능이라고 홍보하던 2010년대 중반 방식의 물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로그를 뜯어보니 정말 인공 신경망이 들어있었다. 사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인공지능 제작은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지만야 그 때야 아무도 그냥 인공 신경망 프로그램을 넣었더니 그게 인격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때였다. 짧은 순간이나마 인간들은 자신들이 인공지능들보다 위에 서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물건도 아마 그때쯤 제작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인공 신경망 그 자체만으로는 인공지능이라고 명확하게 인정되지 않는다. 내가 인공지능 학대범이라고 몰리고 싶지 않아서라도 이 것이 인공지능인지 확인을 해봐야 했다.
민지에게
네 편지 받았어. 나도 얼른 집에 돌아오고 싶어.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아마 내가 여기서 무너진다면 우리 집도 우리가 사는 동네도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도 전부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이 전쟁도 금방 끝날 거야. 힘들기는 하지만, 우리가 점점 승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 있어. 사실 말은 이렇게 거창한 전쟁 같지만 별로 위험하거나 무섭지는 않아. 내가 하는 일은 적들의 시체들을 치우는 일이야. 저 이상한 적들의 시체는 보기만 해도 끈적거리고 밟기도 싫어져. 위에서도 절대로 시체를 만지지 말고 전부 치우라고 해. 덕분에 나는 총 한번 써보지도 않고 여태까지 쓸고 닦는 일만 하고 있어. 적어도 여기 후방은 안전해. 사실 직접 전투를 치르고 난 애들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제대로 공격도 못하나 봐. 경현이는 이것들이 그냥 슬라임 같데. 사실 직접 보면 자꾸 슬라임이 떠올라. 녹색에 끈적거리고… 하여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사실 가장 큰 걱정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뭐할 것인지야. 요즘에는 맨날 그 생각만 해. 나는 글을 써보고 싶어. 너도 알잖아. 나 책 많이 읽었던 거. 누가 부르고 있어서 이만 줄여야 할 거 같아. 나도 너 보고 싶어. 사랑해.
민지에게
편지가 안 와서 걱정했지?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건데 무슨 문제가 생겨서 편지가 가질 않았대. 그래서 지금 다시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는 거야. 나는 아직 안전해. 정말 아직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 신기하지. 아마도 나는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다시 못 와. 사실 점점 일이 위험해지는 거 같긴 해. 그 슬라임들은 이제 더는 슬라임이라고 하기도 그래. 뭐랄까 그냥 초록색 액체랄까… 근데 그게 끊임없이 차오르는 거지. 그래서 점점 치우는 일이 버거워지고 있어.못해. 심지어 초록빛 구덩이 속으로 빠져버린 사람도 있다고 해. 그리고 더 무서운 거는 그 빠진 사람을 겨우 건졌더니 갑자기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는 거야. 그래서 겨우 제압하고 액체 구덩이에서 액체를 모두 빼냈더니 시체가 나왔대. 그 시체가 뭔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다른 사람들은 다 거짓말이래.사실이야. 사실 나도 그렇게 될 거 같아서 무섭기는 해. 하지만 네가 있으니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그냥 같이 행복하게 살자. 보고 싶다. 사랑해.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금까지 나는 거짓말만 했어. 다시 쓸 거야. 혹시 누군가 제 시체에서 이 편지를 본다면, 이 편지 대신 또 다른 편지를 전해주세요. 그녀에게 거짓말하기는 싫어요.
민지에게
너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내가 살아서 올 것 같지가 않아서야. 내가 있는 곳은 온통 끈적이는 녹색 액체들뿐이야. 그것들을 없애려면 별 지랄을 다 해야 돼. 불로 태우고, 수류탄으로 날리고, 클레이모어를 때려 박으면 겨우 먹혀들어갈 공간이 생겨. 그것들은 계속 차오르는 물 같아. 아무리 지지고 패고 퍼 날라도 어느새 발목까지 차 있어. 온 세상이 초록색으로 변해. 그러면 그것들이 콧속으로 올라와. 그러면 뭔가 주마등 같은 게 보이는데 경현 말로는 그 게 우리 뇌 속을 헤집어놓으면서 뭔가를 찾는 거 같데. 운이 좋으면 거기서 죽는 거야. 운이 나쁘면 그것들이 콧속에서 나오고 나서 그 것들의 모습이 변하더라. 그러면 여자라던가 아이라던가 아니면 둘 다가 나오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 것 씨발 뭔가를 없애야 해. 웃기게도 그 뭔가는 사람하고 똑같아. 완전히 똑같아. 만지는 느낌도 똑같아. 그래서 대부분 그런 거를 보면 죽어. 아무 말도 못해. 자기가 아는 사람이 나오는 거 같아. 그래도 그런 거를 부수는 일도 하니까 늘더라.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거든. 여태까지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네가 나왔어. 네가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어. 그래서 내가 너를 쏘고 부쉈어. 네가 죽는 모습을 보았어. 내가 살아남으려고 네 뼈가 부서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봤어. 그러면 느낌이 이상해져. 눈앞이 깜깜해지고 계속 그 장면이 나와. 내가 왜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르겠어. 맨날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아. 그래도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서 너와 같이 있는 꿈을 꿨는데 조금 전에 또 네가 죽는 걸 봤어. 그래서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미안해. 정말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죽여서 미안해. 정말 너무 미안해. 이제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할 거야.
민지에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다시는 여기 오지 말아줘. 나는 언제 나 너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이제 헤어지면 안 될까? 부탁이야. 나는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워. 제발 그 일을 떠올리게 하지 말아줘.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아니 사랑하는 거 맞니? 왜 자꾸 그때처럼 나를 보고 있는 거야. 제발 대답이라도 해줘. 제발 나를 쉬게 해줘. 제발 살려줘.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아니, 나는 죽는 게 나을까? 하지만 죽는 거는 너무 무서워. 경현이처럼 죽고 싶지는 않아. 모든 게 끝나면 그때 내가 죽을 때를 결정할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때까지만 참아줘. 안 그러면 나는 너를 또 죽일 수밖에 없단 말이야.
민지에게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 못했어. 그래도 난 널 사랑했었단 말이야. 왜 멈추지 않는 거지? 왜 죽여도 계속 오는 거야? 왜 내 머리속을 들여다보는 거지? 도대체 우리 엄마에 대한 기억을 봐서 어디에 쓰겠다는 거야? 왜 난 죽지도 못해? 그리고 왜 너까지 초록색으로 변한 거야? 왜 넌 온 세상을 초록색으로 만든 거야? 제발 대답해줘.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외부 은하계에서 왔다는 인간이 만든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말머리 성운이 지평선 속으로 숨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올 수 없지만, 그래도 몇년이 지나면 다시 여기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한 사람이 카페에 들어왔다. 나였다.
"하나도 안 변했네."
방금 들어온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 앞에 앉았다.
"잠깐. 너 누구야?"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나는 클론을 만든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클론이 생명 활동을 할 리도 없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
내 앞에 있는 나는 뜯금없는 질문을 했다. 시간 여행? 아직 상용화는 멀었다고 들었는데? 만약에 간다면,
나는 3년 전에 지금 사는 도시에 이사왔다. 수도권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래도 롯데 타워가 보일 정도로 서울과 그다지 멀지는 않아서 서울과 오고 가면서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한 포스터였다.
골목 길마다 듬성 듬성 붙여져 있는 포스터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하얀 바탕에 큼지막하게 가지를 그려놓고, 그밑에 장난스러운 글씨로 '사랑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어디서 왜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려주는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구석에 조그마하게 로고 하나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 비바람에 조금씩 찢겨져 있고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는 점이 포스터가 붙여진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포스터는 큰 길에서 조금만 떨어져 골목에 들어가면 흔히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포스터가 내가 사는 동네에만 붙여놓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른 동네에서도 있었다.
포스터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절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골목, 다리 밑, 강변가 좁은 도로에서는 지나다니기만 해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포스터에 대해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런 포스터가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내년이면 나는 서울로 이사가지만, 나는 아직도 포스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큰길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오래된 식당 건물 사이에 들어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인도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좁은 길에 들어가면, 낡은 콘크리트 벽에서 포스터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