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 걸음

세상이 불타고 있다.

잿빛 건물은 산산히 무너져 시뻘건 불길 속에서 재와 함께 춤을 춘다. 하늘은 붉고 검은 연기가 세계를 뒤덮는다. 온 세계에서, 모든 공간에서 이 검붉은 빛깔이 어른거린다. 검은 산 위에 그가 서 있다. 그의 옆에, 수억의 사람들이 서 있다. 가지각색인 그러나 동일히 개운하다는 듯 미소하는 저 표정들. 그 눈동자에 세계가 서린다. 세계가 다시금 문명 이전으로 소급되고, 모든 반복이 끊어지고, 가증한 면상의 천사들이 추한 깃털을 마악 흩뿌리며 추락하는 사이, 일곱 사슬이 하나 둘씩 깨져나가면서 하늘이 열린다.

그 붉은 하늘의 검은 별들이, 마침내 춤추고 그 아래에서 사람이 하나, 안개를 마악 헤치고 걸어나온다. 키 작은 형상, 그 손에는 사슬로 치렁치렁 묶인 붉은 검이 있다. 그가 검을 쥐고, 세계를 양단한다. 불 타는 소리며 비명이며 어디서 말이 길게 우는 소리. 붉은 소리가 만인의 귀를, 내 귀를 울린다. 우리 신의 아래에서 나는 내 형제자매와 하나이니, 내 주인께서는—


"아버지."

여자가 침실에서 비틀대며 걸어나왔다. 눈에는 막 잠에서 깬 피로가 서려 있고, 새카만 머리칼은 제멋대로 뻗쳤음에도 매서운 분위기가 살아있었다. 여자는 한번 더 아버지, 하고 혼잣말하고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냈다. 물병에 성에가 곰팡이처럼 피었다. 가볍게 물 따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꿈결을 회상했다. 벌써 오 일째 이런 꿈을 꾸고 있지 않는가. 좋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