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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사망死望.
- 그대여. 어서, 어서 사라지거라
- 비명
- 001 : 보라색 비의 제안 - 이스카리옷 유다Judas Iscariot
- 실종선고
- SCP-XXX-KO 조용한 사색의 시간
- SCP-XXX-KO 공포에 질린 대지
- SCP-XXX-KO 피자배달부 존
- 화려한 휴가
- 401
- 그리움의 찬가
- 아픔의 찬가
- 외로움의 찬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손으로 쓰는, 아주 긴 시간의 편지를 쓸 겁니다. 귀에 헤드폰을 쓴 채 빗소리를 들으며 키보드가 눌리는 소음을 바닥에 깔 겁니다. 그 위에 멋진 가구를 놓을 계획입니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면 너무나 슬픈 집이 되겠죠. 그래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보고 싶어졌습니다.
4월에도 눈은 옵니다. 미처 다 녹지 못한 채, 풀 위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눈덩이가 마치 꽃 같습니다.
00.
모든 꿈이 끝나버린 거리 위를, 한 남자가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주인 없는 가게의 풍경을 건드렸습니다. 빈 도로에 맑고 고운 소리가 울렸고, 남자는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흩날리는 신문지와 깡통들 뿐이었습니다. 아직은 낮.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버려진 백화점으로 갈 셈이었습니다.
백화점은 사태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약탈당한 곳이었습니다. 백화점을 거점으로 삼았던 생존자 그룹은 꽤 컸고, 따라서 와해되기도 쉬웠습니다. 그들은 채 두 달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백화점은 버려졌습니다. 아무도 들어와 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식료품들은 약탈 당한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있었습니다.
"안녕."
"안녕."
남자는 백화점 앞에 서서 내뱉었습니다. 남자의 머리 위에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정문 앞에 심은, 제법 성장한 버드나무 가지. 그곳에 여자 하나가 목을 매단 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킥킥거렸습니다.
여자는 좀비였습니다. 오한과 미열로 아팠을 때, 아무도 그녀의 곁에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녀는 그래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버드나무 가지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좀비가 되었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가 뇌에 침투하기 전에 스스로 죽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댓가로 영원히 매달린 채 살아가야만 합니다. 몇 개월 전의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오랜만이야. 오늘도 건전지?"
"아니. 너 때문에 왔어."
"무슨 일인데?."
"군대가 이 곳을 폭격할 거야."
"…"
침묵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조용히 여자를 응시했고, 여자는 조용히 남자를 응시했습니다. 이내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싫어. 내려가지 않을래."
"폭격이야. 너 혼자서 어떻게 못 해."
"그래도 내려가지 않을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자가 이러한 고집을 피울 때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대신 그는, 조용히 "내일 다시 올게." 하고 몸을 돌렸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은 신문지와, 버드나무 가지와, 그곳에 매달린 여자의 몸을 흔들었습니다. 여자가 "내일 봐." 하며 읊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갔습니다.
그 바람의 소리가, 오래 전의 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01.
- 왔어?
남자가 아직 청년이던 시절 - 그리고 여자가 아직 소녀이던 시절의 일입니다. 남자의 꿈은 외교관이었고, 여자의 꿈은 작가였습니다. 남자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시점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 살아났고, 대부분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모든 꿈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습니다. 외교관도, 작가도. 대신 남자는 자신의 건장한 체격을 살려서 자경단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나이가 어렸기에 보호받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둘은 대학교 그룹에 있었고, 사람들은 죽어 갔습니다.
- (문을 닫으며.) 응.
그룹은 화목했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울었습니다. 하지만 감성이라는 것은 썩어 문드러진지 오래되어, 그것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썩어가기 마련이었습니다. 무덤은 늘고 늘어서, 어느새 그룹 안에는 남자와 여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 창현이가 죽었어.
- 그럼 이제 정말 우리 뿐이네.
여행에 지친 그들은 도시에 눌러 앉았습니다. 물자를 찾는 법을 배웠습니다. 없는 흙을 긁어모아, 텃밭도 만들었습니다. 전기가 끊기기 전에 중요한 문서들을 인쇄했습니다. 라디오를 수리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 응. 우리만 남은 거지.
- (침묵.)
장례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남자는 면역자였지만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시신을 끌고 와 낑낑거리면서 땅에 파묻는 모습을, 여자가 지켜보며 눈물 흘리는 것이 그들의 장례였습니다. 그들은 죽어간 동료를 위해, 옹기종기 모인 일곱 개의 무덤을 팠습니다.
- 창현 오빠, 잘 가.
- 잘 가라.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일이 없었기에 -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죽은 사람들은 산 사람들을 뜯어먹는 세상에서도 제법 옛날의 흉내를 낼 수 있었습니다.
- 좀비로 죽은 건 아니지?
- 아니야. 우리보고 잘 살라고 말해주었거든.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는 차갑기만 한 서울의 끝자락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 잘 살자.
- 그래, 꼭 잘 살자.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 (침묵.)
아주 행복했었습니다.
02.
남자가 백화점을 나와 거리를 걸었습니다. 시간은 오후였지만, 남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석양이 지면 늦을 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밤은,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했습니다. 남자는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남자의 집은 널찍한 고급 아파트였습니다. 예전에는 둘이 살았지만, 이제는 혼자입니다. 부서진 유리 문을 타넘고 들어간 그는, 계단을 따라 6층까지 올라갔습니다. 계단은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과, 핏자국 때문에 을씨년스러웠습니다. 6층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집 문을 열며 중얼거렸습니다. 깨진 복도 창문에서 바람이 우수수 들어왔습니다.
"왔어."
- 응.
대답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자만 살고 있습니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 예전에 그가 들어올 때마다 "어서 와." 하며 말하던 여자를 기억하고, 냉장고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저녁을 먹을 생각입니다.
양파와 감자를 무심코 두 개 꺼내려다, 하나만 꺼냈습니다. 남자가 작게 웃었습니다. 껍질을 깎고, 작게 썰어, 프라이팬에 볶기 시작했습니다. 식욕을 자극하는 소리가 퍼졌습니다. 이제 밥과 김치를 꺼낼 차례였습니다.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습니다.
"김치가 안 잘려 있네."
- (김치통을 바라보며) 내가 자를까?
"아니."
남자는 혼잣말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없는 대답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것도 익숙해졌습니다. 아마 여자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여자라면 이 때 즈음에, 여기 있겠지. 남자는 아직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왜 아무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는 건지 짜증나는 시간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서,
- 밥 몇시에 먹을 거야.
하고 묻지 않을 생각인 건지 궁금해 하는 시간이. 그러다 더 이상 여자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웃는 게 전부입니다.
남자는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남자는 울지 않고, 프라이팬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느새 감자가 다 익어 있었습니다. 밥과 김치를 넣어 김치 볶음밥을 만들었습니다. 제법 맛있었습니다. 그 날의 석양이 남자의 식사를 비추었습니다.
남자는 밥을 깨작거렸습니다.
그는 내일 다시 여자에게 갈 생각이었습니다.
03.
해가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여자는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채,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그 모습을 계속해서 봐 왔습니다. 아스팔트 너머로 해가 기울고, 하늘은 붉게 물들고, 깨지지 않은 유리들은 태양의 피를 뒤집어쓴 채 눈을 괴롭힙니다. 단말마, 단말마, 단말마. 여자가 이따금씩 단말마라고 표현하곤 했던 석양의 마지막 한 줄기마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면, 밤이 찾아옵니다.
밤.
더 이상 도시는 빛나지 않습니다. 광공해가 없는 하늘에 빛나는 건 별과 달이 전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곤 했던 밤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망자들 뿐입니다. 침묵을 쫓는 건 이름 모를 괴성 뿐입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이 귀를 찢어댑니다. 썩어가는 살점의 악취가 코를 후벼팝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여자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한번 죽었습니다. 좀비들은 그녀를 노리지 않았고, 그녀는 그래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 그녀는 밝은 밤눈으로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목격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습니다.
의미 없는 일이었습니다.
힘없이 떠돌아다니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썩어가는 자신의 몸뚱아리 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반복해 왔습니다. 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것의 몸이 어떻게 썩어가는지 관찰하는 일. 그 일이 그녀를 갉아먹는 지루함에 행사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습니다.
여자의 눈이 하염없이 괴성이 일어나는 곳을 좇았습니다. 시체들은 오로지 밤에만 일어납니다. 그들은 느립니다. 살아생전 바쁘게만 살던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그들은 한없이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몸으로, 양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아마도 평생 닿지 못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부르짖고.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선을 끄는 시체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반신이 잘려나간 채, 허리를 지면에 문지르며 움직이는 시체였습니다. 두 팔로 몸을 질질 끌면서, 핏자국을 남겼습니다. 다른 좀비들의 배는 느린 속도였지만, 그것은 아주 느리지만 고집스럽게 움직였습니다. 분명 아플 테지만 얼굴에는 아픈 기색도 없었습니다. 왼 팔로 땅을 짚고, 다시 오른팔로 땅을 짚고 - 그리고 허리를 이끕니다. 살점이 땅에 갈려 조금씩 마모되어 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밤 속으로 몸을 질질 끌며 사라졌습니다. 여자는 가지에 매달려 다시 어둠을 응시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느낌으로 움직이던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습니다.
04.
남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 오빠, 담배 피러 가자.
- 어.
여자는 아직 썩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외투를 걸쳤습니다. 집 안에서 담배를 핀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무는 해가 잘 보였습니다. 버려진 놀이터에서, 그네를 하나씩 골라 잡았습니다. 여자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 창현이가 가르쳐 준 거야?
- 응.
- 안 좋은 것만 가르치고 갔네.
-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상관 없지 뭘.
여자가 입을 벌리자, 담배 연기가 흩어졌습니다. 연기는 이내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사람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자는 그것을 묵묵히 쳐다보았습니다. 여자가 킥킥, 하고 웃더니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 나랑 같이 갑시다. 우리는 당신의 혈청이 필요해요.
굵은 남성의 목소리였습니다. 남자는 실험실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면역자. 좀비의 피를, 체액을 아무리 뒤집어써도 감염되지 않는 면역자. 그는 치료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의 의사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 아파.
여자의 모습이 지워졌습니다. 여자는 이제 검은 실루엣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여자의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 아파.
실루엣의 목에 밧줄이 걸렸습니다. 실루엣은 밧줄을 목에 걸고 버드나무 가지로 천천히 걸어가, 스스로를 매달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다시 여자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바라보던 여자가.
여자가 말했습니다. 어디서 났는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채였습니다.
- 담배는, 그런 것 같아. 연기가 올라가는 걸 보면 걱정도 같이 올라가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 나는 잘 모르겠다.
- 오빠도 필래?
여자는 담배를 입에서 꺼내, 그대로 남자의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남자는 그것을 자신의 입에 넣었습니다. 연기가 폐를 채웠습니다.
- 아무 느낌도 안 나.
- 원래 그런 거야.
그 날, 남자는 끌려갔었습니다. 돌아왔을 때에는 여자가 가지 위에 걸린 뒤였습니다.
가지에 걸린 여자를 보았을 때, 담배의 향이 입 안에 남아있었습니다.
05.
남자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이불과 베개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축축한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쉬었습니다.
06.
서랍에 넣어놓은 담배를 꺼내, 놀이터의 그네로 다가갔습니다. 일출의 밝은 빛이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으로 바람을 가렸습니다. 남자의 손 안에서 작은 불빛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는 담배를 손으로 붙잡고, 입에 넣었습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담배 맛이 조금씩 났을 뿐입니다.
이내 남자는 무표정하게 담배를 던졌습니다. 놀이터에는 부러진 꽁초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그네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디선가 찾아낸 큰 우산을 두 개 챙겼고, 캐리어도 두 개 챙겼습니다. 남자는 그것들을 차에 전부 실었습니다. 짐들은 무거웠습니다.
썬팅이 짙은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트렁크에 실린 캐리어가 두 개, 비상용으로 챙긴 기름도 꽤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백화점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남자가 양산을 하나 들고 내렸습니다. 그는 양산을 버드나무에 기대 놓고, 백화점 안에서 사다리와 톱을 찾아왔습니다.
여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남자는 발을 올렸습니다.
07.
발이 사다리를 밟아 나갔습니다. 하나, 둘. 남자와 여자의 키 차이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두 명은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
"지금 자른다."
"난 안 내려갈 거야."
"…"
남자가 묵묵히 톱을 올렸습니다.
"안 자를 거잖아."
톱이 위협적이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밧줄을 자르지는 않았습니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잖아. 내가 잘라 줘, 하기 전까지는 자르지 않는. 킥킥…"
여자가 손가락을 올려, 남자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원수를 노려보듯 밧줄을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침묵이 그를 대신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여기 서 있는 채로 죽을 거냐고.
"난 어차피 겨울이 되면 죽어."
썩어가는 손가락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여자가 서글픈 눈으로 잎사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 잎들이 낙엽이 되고 나면, 나를 햇빛에서 가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그럼 나는 일출을 바라보며 죽을 거야."
"왜 자살하려고 하는데?"
"틀려, 오빠. 자살이 아냐."
남자는 답답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보며, 예전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녀가 가지 위에서 남자를 기다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밧줄을 버드나무에 매달며 울었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아프고 힘들어서 오로지 그만 기다리다 죽어갈 때도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돌아오지 않아서 밤새 걱정했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했습니다.
공포에 떨면서 집 안에 틀어박힌 자신에게, 남자가 왔었던 때를 기억했습니다.
08.
- 가자.
자신을 먹으려고 하던 부모.
- 살 사람은 살아야지. 가자.
처음으로 휘둘러 본 골프채.
- 집 안에 있는다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 우선 살아야 뭐라도 할 거 아냐.
사람의 살점이 터져나가던 감각.
- 같이 나가자.
여자는 부모의 사체를 한 번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깥의 햇빛은 어느때보다 따뜻했기에, 여자는 곧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가두어 둔 마음이 차츰 삐져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죽어갔지만 필요 이상으로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느리게 마모되어 갔습니다.
곧 있으면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네. 날이 눅눅하니 잠이 들기가 쉽지 않아.
그래, 오늘은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의 얘기를 해 보세나. 얼마 전에 내게 편지가 날아왔었네. 어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양인데,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네. 하명河鳴에게 넘겼지. 자네도 흥미 있을만한 물건이라 편지의 필사본 정도는 남겼네. 한번 봐 보게.
「선생님,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무진 근처에 해사海沙라는 고장이 있습니다. 전 거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무진을 덮은 안개에서 살짝 비껴난 곳입니다. 가구 수가 30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양친兩親께서 제가 여덟 살이었을 때 이주하셨습니다.
그곳에는 괴이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몽전쟁麗蒙戰爭 시기에 밀교密敎 분파 하나가 남 몰래 내려왔던 모양입니다. 저들끼리 사라각邪癩覺이라고 부르는 사이한 종파입니다. 태조께서 새 나라를 세우실 때에 그들도 같이 몰아내셨으나 사악하고 괴이한 행사를 행했던 모양인지라 땅과 주민에 그 여파가 남아 있었습니다. 괴력난신에 현혹된 주민들이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각이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한 사람들 가운데, 머리색이 변하고 괴이한 치유력을 얻은 일가一家가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는 일각1이면 완전히 치유되며, 위중한 치명상도 아물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대대로 생명이 꺼지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근처 산야山野에서 아이 형태로 발견되는 족속이라고 합니다.
마을 중앙에 그 일가의 여아女兒가 하나 묶여 있었는데, 8살 남짓하였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여아를 묶여놓고 하는 일이라는 것이 굶기며 학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더러는 돌로 치고 더러는 생 살에 불을 붙여 가가대소하며 관람하고는 했습니다. 양친 모두 이 천인공노할 행위에 분노하셨지만 어째서인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도 함구하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때때로 제가 그 아이에게 몰래 밥을 주러 나갈 때 묵인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이 듣도보도 못한 괴사에」
하명河鳴의 견해는 나와 조금 달라.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고 보고 있네.
글쎄. 아마 녹 먹는 자들이 나서겠지. 어쩌면 이미 나섰을지도 모르네. 파견한 인원이 희생되었다고 적혀있지 않나.
…이금위異禁衛 말일세.
땅에 겨울이 내렸다.
모처럼의 휴일이라 바깥에 나갈까, 하다 운전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흔들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아직 머리가 멍했기에 나는 아래로 내려가 원두를 한 움큼 집었다. 블렌더에 넣고 갈자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우울감과 리듬을 담아 내 정신을 두들겼다. 나는 그 원두를 가지고 드립 커피를 하나 만들었다.
맛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추웠다. 찾아갈 친구도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는 저번 주에 죽었다. 트럭이 그의 몸을 덮쳤고, 그는 그 도로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그의 피날레였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좋은 퀄리티였고, 그래서 더 슬펐다. 우리는 5년을 기다렸다.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에필로그가 선언되었다. 나는 딱히 장례식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밤만 새웠다. 나는 그 선고에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모두가 그랬다. 그건 맵지 않고 썼다. 지독하게 속이 쓰렸지만 얼굴을 붉히게 만들지는 않았다. 한숨소리가 울음을, 혼잣말이 비탄을, 탄식이 절규를 대신해 퍼져만 갔다. 짐작컨대 우리 모두는 내심 그가 죽었다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쩡한 기혼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숨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우리는 이미 몇년 전에 각자 장례식을 했으면서 또 장례식을 했다. 가짜 장례식은 성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나는 달디 단 커피의 힘을 빌려 밤을 새웠다.
그 날에 우리는, 그저 그가 멀리 가 버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문득 창 밖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눈사람이 하나 둘 굴러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친구의 아이는 이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눈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하루종일 게임에만 몰두했다. 그는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게임은 핑계였을 뿐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내 친구의 젊은 아내는 차마 뭐라도 하지 못한 채 홀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녀의 앞에 놓인 길은 가시로만 가득했다. 내가 도저히 도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가시였다. 나는 차마 그녀의 처지에 선 자신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너지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녀가 실종선고를 들었을때 한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맞았다.
내 친구는 갔다. 정말로 멀리 가 버렸다.
우리 모두에게 버리는 일이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그녀가 매주 청소하던 그의 방은 천천히 비워졌다. 내버려둔 지 오래되어 이젠 버리기조차 애매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버려야 했다. 제 때를 놓친 물건들이 내보내는 향수와, 추억과, 기억들과, 감정들의 편린이 힘든 선택을 강요했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에게 보내려고 썼었던 연하장들을 다 버려 버렸다. 재활용 통에 덩그러니 널부러진 연하장들의 표지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상사의 상투적인 안부 메세지였다. 난 그에게 이미지를 섞어 성심성의껏 답장을 한 뒤에 갈 곳 없는 눈을 벽으로 돌렸다. 오래된 사진을 걸어놓은 곳이었다. 그와 내가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을 앨범에 담아서 전시해두었다. 나는 내심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일종의 위안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완벽히 그를 포기했다면 난 저 사진마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버리지 않았다. 나는 버리지 않았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크랩해뒀던 기사를 떠올렸다. 흥신소의 보고서가 새록새록 기억났다. 내가 그를 버리지 않았던 시간동안 했던 모든 노력들은, 아직도 내가 그런 걸 하고 있다는 마냥 내게 위로를 속삭였다. 난 충분히 했다. 할 만큼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다고 알려주는 그런 속삭임이었다.
눈물이 났다.
아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울면서 안도했다. 정신을 차리면 이 안도감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넘치는 눈물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울면서 그 액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벽에 걸린 싸구려 위안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흐느꼈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눈길을 밟는 소리가 사박사박, 하고 들렸다.
일련번호: SCP-XXX-KO
등급: 안전(Safe)
특수 격리 절차: 대상은 현재 제 40 격리기지에 보관되어 있으며, 통상의 순찰 및 보안 외에는 별다른 격리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원은 기지 내의 관리과에서 허가 서류를 가져올 때 대상을 사용할 수 있다.
설명: SCP-XXX-KO는 현대 뉴 슈퍼 에어로시티 기종의 시내버스로, ██고속의 창원-██ 왕복 버스로 이용되고 있던 중 변칙 현상이 보고되어 회수되었다. 이 변칙 현상은 SCP-XXX-KO의 내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책의 구독을 완료할때까지 일어난다.
변칙 현상은 대상의 시간 개념에 일어나는 것으로 관측되었다.
일련번호: SCP-XXX-KO
등급: 안전(Safe)
특수 격리 절차: 대상 주변은 무장한 경비 두 명이 상시 통제해야 한다. 대상이 위치한 장소를 쓰레기 폐기장으로 위장, 해당하는 구역 위에 철제 컨테이너를 여러 개 떨어뜨려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이 은밀히 출입하는 경우의 수를 제한했다. 컨테이너 앞을 사무실로 위장해 재단의 직원이 경비하기 편하게 했다. 민간인의 출입은 완전히 제한하며 해당 개체를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허가서가 필요하다.
설명: SCP-XXX-KO는 지름 2미터의 원형 공간이다. 개체와 일반적인 대지는 물리적이나 화학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지 않으며, 단순히 변칙 현상의 발현 유무로만 구별할 수 있다. 해당 구역에 생명체가 완전히 들어갈 경우, 변칙 현상이 일어난다.
일련번호: SCP-XXX-KO
등급: 안전(Safe)
특수 격리 절차: 대상은 시의 빌딩부터 빌딩 사이에 위치한 골목에 나타나며, 허가받지 않은 인원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해당 부지를 재단이 사들여 골목길의 입구와 출구를 벽으로 막은 상태이다. 해당 구역을 순찰하는 두 명의 무장 경비와 폐쇄회로 카메라 이외에 추가적인 격리 조치는 필요하지 않다. 다만, 실험 목적으로 해당 개체를 이용할 경우 소아용 기억 소거제와 발신기를 준비, 발신기를 실험에 투입되는 인원에게 부착하고 실험이 끝난 후 기억 소거제를 투여하는 것이 권장된다.
설명: SCP-XXX-KO는 한 손에 피자 상자를 들고 있는, 보라색 긴팔 셔츠를 입은 10대 후반의 소년이다. 해당 소년의 신원은 19██년에 실종된 John ████████으로 확인되었으나 대상은 대상의 신원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상과의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하나, 일정 수준의 친목감이 형성되는 순간 대화를 시도한 사람의 기억이 지워지는것으로 나타났다.
SCP-XXX-KO의 변칙 현상은 대상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와 대면했을때 발생한다. 대상은 어린이에게 통상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어린이가 대상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면 대상은 어린이를 '납치'한다. 손을 잡는 순간 두 개체는 모두 소멸하며, 1개월간 나타나지 않는다. 1개월 후 대상만 다시 골목에 나타나게 된다. 납치된 어린이는 대상이 다음 납치 대상을 물색할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납치당한 아이들과의 면담에서 아이들이 대상과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으나, 그들이 있었던 장소만은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단순히 장소를 설명할만한 단어를 찾기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SCP-XXX-KO는 1개월이 지나면 다시 골목에 등장하며, 어린이와 대면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골목을 배회한다. 다음 어린이를 납치하는 순간 이전에 납치되었던 어린이가 반경 10마일 이내 무작위 지점에 등장하며, 따라서 이 순간 모든 아이들은 발신기를 켜 놓아야 한다. 대상이 6개월동안 아이를 납치하지 못할 경우 대상은 극도로 절망감에 빠진 듯한 행동을 하며, 이는 PTSD나 공황장애와 증상을 공유한다. 이 시기부터 다음 어린이가 시야에 들어올 때 까지 대상의 형태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나며, 대상을 목격한 사람은 극심한 PTSD 증세를 나타내게 된다.
면담 기록 XXX-████의 인터뷰 파일
SCP-XXX-KO의 신원을 파악해 격리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자세한 사항은 숨긴 채 공고를 내었다. 놀랍게도 타 기지에서 근무하던 D등급 인원 한명이 자신이 그를 죽였다고 증언했다. 해당 인원은 면담 이후 정상적으로 처분되었다.
D-1233352 : (대상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래, 이놈. 기억나. 이놈때문에 기분이 영 꿀꿀해서 실수를 했거든. 그래서 경찰에 잡혔었지. 우와, 내가 얼마나 초보적인 실수를 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거야…
박사 : 요점만 짧게 말하십시오.
D-1233352 : 거 재수없게. 그래. 9월이었나? 9월 초였을거야, 아마. 더위가 슬슬 가시고 있었거든. 나는 프레드네 가서 약 빨고 돌아오느라 걷고 있었고. 근데, 그렇게 골목길을 걷다가 저 놈을 본거야. 왼 손에는 피자 상자를 들고 있었지. 어디 배달이라도 가나, 하고 생각했어. 배고팠으니까. 그래서 한 입 달라고 했지.
박사 : (헛웃음)
D-1233352 : 아니, 근데 잘 들어봐. 보통 나처럼 배고픈 사람이 피자를 달라고 하면 줘야 하는거 아냐? 근데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럼 내가 화가 나 안나. 화가 나지? 그래서 그런거야. 별 이유 없어.
박사 : 딱히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D-1233352 : 딱히 없던 것 같은데.. 아니, 내가 그때 약을 빨고 있어서 환각을 본건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단 말이야. 그래. 걔가 계속 어떤 사람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 자기 사촌동생인데 오늘이 9살 생일이었대. 총에 맞고도 그걸 기억하는게 진짜 대단한거지. 피자를 되게 좋아한다더라.
박사 : 그게 전부인가요?
D-1233352 : 당신 박사라더니, 빠가사리야? 저걸로 끝이면 내가 잡히지도 않았겠지. 그러고 피웅덩이에서 몇번 헤엄치길래 "얘가 슬슬 뒈져가는구나.." 했는데, 얘가 지 피로 오망성을 그려놓은거야. 길바닥에. 난 질겁해서 그걸 발로 지워보려고 했지. 경찰들이 악마주의자에 환장하는거 잘 알잖아.
박사 : 그래서 어떻게 됬습니까?
D-1233352 : 그래서 한 반쯤 겨우 지우니까 되게 불쌍해보이는 눈으로 날 보더라. 내가 마지막 희망을 짓밟았다는 눈빛이었어. 좀 멍청하게 서 있었지. 그러고 좀 있으니까, 걔 시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피가 죄다 허공으로 빨려나갔어. 난 그걸 보고 뒷처리 안 해도 되겠다면서 그냥 돌아왔고. 그거 시체까지 확실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박사 : 면담 여기서 끝내지. 끔찍하군.
D-1233352 : 이거 말하면 사는거 맞지? 내일이 처분인가 뭔가라며. 내가 이렇게 쓸모 있는 사람이잖아. 이제 살 수 있는거지?
박사 : 그건 내 관할이 아니오.
(기록 종료)
난 진짜로 이번엔 조용히 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솔직히 말하자. 캘리포니아에서 미시간까지 가는 기차에, 그것도 21세기에, 열차강도가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억? 조? 경? 아니, 그래. 생각보다 그 확률이 높다고 치자. 그러면 그 열차강도가 내 휴일에 발생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도대체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걸까?
내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았다. 짜증은 약간 났었지만, 이런 일이야 많이 봐오던 것 아닌가. 어디까지나 이번의 나는 휘말린 것이지 딱히 내가 뭘 주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 그건 재단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 따라서 작성할 보고서도 제출할 시말서도 없다. 순식간에 열차 한 칸을 제압한 하나의 강도떼가 신이 나서 서로를 향해 웃고 떠들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그 강도단이 사실은 강도단이 아니라 일련의 정신나간 락 밴드라는 걸 안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그들의 무기는 총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상은, 글쎄. 뭐, 일반적인 테러리스트의 사상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겠지. 그 빌어먹을 휴가 파괴자들이 서로를 향해 낄낄거리면서 scp-510-ko를 꺼낸 순간 난 본능적으로 27기지의 누군가가 이미 시말서를 완벽하게 제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 마이크를 본 순간부터 나는 욕지기로 그들의 '작은 콘서트'를 조금이나마 방해함과 동시에 주머니 어딘가에 찔러넣었던 고성능 귀마개를 귀에 처박았다. 난 아직도 나의 시끄러운 룸메이트 리처드에게 감사한다. 그가 없었다면 내가 제출했어야 할 시말서의 크기는 더욱 커졌을 테니까. 그들은 친절하게도 공연 시작의 소리를 열차 안에 생중계했고, 나는 가까스로 그들의 첫 곡이 시작하기 전에 귀마개를 끼울 수 있었다. 짝퉁 시드 비셔스가 베이스를 튕기기 시작하자 기차 안은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난 능숙하게 춤을 추는 척 하며 재단의 메세지에 긴급히 분실물의 위치를 알렸다. 남은 건 열차가 다음 역에 정차할 때 까지 이들을 제압해두는 것 뿐이었고, 난 다행히도 그 일에는 프로였다. 나는 천천히 그들의 마이크로 다가가 전원을 꺼버렸다. 당황한 대중들과 꼬꼬마 밴드가 현실을 자각하기 전, 난 약간의 울분을 담아 마이크를 뺏어 다시 전원을 킨 뒤, 한 마디 쏘아붙였다.
"이런건 음악이 아냐, 등신아."
이게 음악이지.
우쿨렐레의 완벽한 연주를 들어라.
401 수분과정 / 기억소거 및 전근요청. 카잔님 리퀘
언제나 그건 저희 어깨 위에 걸터앉아 꽃향기를 노래하곤 했지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 때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할 때에도, 바닷바람을 맞으려 창문을 열어놓을 때에도 안개는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이 손 끝에서 머물다 사라지곤 했죠. 요새는 매미 소리가 들려올 무렵, 별꽃을 이리저리 꺾어 모아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던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는 담배를 피지 않았었어요. 연기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제 곁에, 무진은 우리 속에. 기억은 선명하고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그대의 묘사가 제 안에 있습니다. 목소리는 반 쯤 한숨 쉬는 듯 하고, 얼굴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며, 행동이 귀엽다고 했나요. 모아놓고 보니 제대로 상상이 되지 않네요. 글쎄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제게 있어 확실한 건 당신이 상냥했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걸로 좋았었어요.
작은 가게도 하나 있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녀석도 있었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양이도 하나 있었고, 그리고 따뜻하게 "왔어?" 하고 말해주는 당신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두 달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을 볼 수 있어서 기쁘네요. 별꽃이 낮은 높이에서 흐드러지도록 피었습니다. 봄입니다.
아픕니다. 저 목련의 백색이 그대의 병원복과 같아서 아픕니다. 무진의 안개가 겨울의 입김과 닮아서 아픕니다.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아픕니다. 봄입니다.
민들레 끝자락에 맺힌 물방울이 보입니다. 이슬이 아닌, 빗방울입니다. 올해의 첫 비가 드디어 내렸습니다.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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