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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불꽃놀이.
요즘 세대에 낭만적인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한 명 있지. 내가 딱 한 명 알아. 그 학생, 매달 15일 밤만 되면 공원에 나타나거든. 치안 안 좋았으면 확실히 죽었을거라고.
그러고보니까 그 친구 콜로라도로 간다고 했었죠. 자기는 눈 오는 날씨가 좋다면서. 미시간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으면서 눈은 질리지도 않나 봐?
겨울에는 눈이 온다. 틀림없는 사실.
고등학교 매점에는 늘 얼굴이 우울한 점원 하나가 있었다. 나보다 고작 세 살 밖에 안 늙었으면서, 나와 같은 음료수를 마시는데도 왜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그런 점원이. 그는 수업이 끝나고 가장 빨리 달려가도 늘 매점에 있었고, 가장 늦게 걸어가도 늘 매점에서 음료수를 마셨다. 내가 가끔 그 많은 음료수들의 출처를 물어보면,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몇개는 삥땅친거라고 말해 주었다.
클라이언트에 관한 이야기는 원칙적으로 안 되지만, 특별히 들려줄게요. 휴일이니까 할 일도 없고.
한국인 청년이었죠. 영어는 잘 못 했고요. 뭐, 한국말 할 줄 안다는걸 안 후에는 해결된 문제였지만요.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점에 대해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외견상으로 보면 당연한 문제죠.
말투는 평범했어요. 조금은 횡설수설하고, 부끄러워하고. 제게 기억을 제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요. 무슨 기억을 먹었는지는 얘기하지 않도록 할게요. 특별하지는 않은 기억이었어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하지만 기억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사건의 특수함이 아닌, 감정의 특수함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평가하자면 매우 좋았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느낌이죠. 평면적인 인물들이 나와 지루한 이야기를 하지만 좋은 문체를 가진 책. 일상에서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그 청년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생각해보니 아쉽다. 한번쯤 더 만나서 다른 기억을 먹어보고 싶어요.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느끼는 걸까요, 그 청년.
솔직하게 말해서 전 그 청년이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질문 하나로 그런 따뜻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요즘은. 마음의 온기가 유별나게 강한 사람이죠. 아, 자꾸 생각하니까 더 먹고 싶네. 오늘 휴가 내도 되요?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요. 그러고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금요일이면 내일 주말이니까 정말 좋을텐데.
예? 월요일이요? 안돼.. 귀신 군, 빨리 시간을 앞으로 돌려요. 이대로 5일을 더 버틸 수는 없어요.
이 노래요? 음, 아까 말한 청년의 벨소리였죠. 그 전부터 유명하기는 했지만, 청년의 말이 인상적이어서요. '언젠가 제가 봄을 잊어버리게 되면, 이 노래가 대신 알려 줄 겁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겠네요. 요즘 보기 드문, 감성적인 사람이었어요.
4월 21일.
리즈, 잘 지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 후면 1학년이 끝나게 됩니다. 네, 한달 후면 당신을 보지 못한지 정확히 일년입니다. 3학년은 힘들겠지요. 힘내도록 하세요. 당신이 쏟아붇는 시간은 의미가 있어요. 지금은 확실하지 않을지라도.
별이 잘 보이는 날입니다. 지난 며칠간 몸이 다시 안 좋아졌습니다. 내일은 아마 수업에 못 갈 지도 몰라요. 밤새 회복한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작년의 당신은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걸맞게, 가장 밝게 지내주었죠. 고마워요. 현실이 당신의 별을 가릴지언정 꺼트릴 수는 없습니다. 타다 남은 양초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음, 그래요. 그때즈음의 당신은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같았죠. 보고 있자니, 흐뭇해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시간이 나면, 하늘을 보세요. 미시간은 오리온이 잘 보이는 곳이니까요. 잘 자요.
4월 29일.
리즈, 빗소리 좋아하나요? 오늘은 비가 왔습니다. 하늘이 구름 뒤로 완전히 가려졌죠. 제가 1년 전에 그랬던 적이 있죠. 사람들은 타인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빗소리를 좋아합니다. 당신을 지우려고 노력을 한 댓가로, 저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아이의 조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참 고통스러웠는데.
밤이면 가끔 꿈을 꾸고는 합니다. 조금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제밤은 당신이 꿈에 나왔습니다. 헉헉거리면서 잠에서 깼죠. 당신이 꿈에 나오면 늘 그렇듯 다음날은 기분이 나쁩니다. 증거니까요. 제가 과거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쓰고 있다는. 첫사랑이란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언제쯤 집착을 덜 수 있을까요.
어깨를 기댈 사람이 없다면, 벽에 기대세요. 벽에 어깨를 기대는 일도 나름 편안합니다.
5월 7일.
리즈, 오늘은 팔목을 그었습니다. 아, 심각하게 그은 건 아닙니다. 커터칼로 긁은 것에 가까우니까요. 남에게 동정을 사기는 좋지만 흉터는 남지 않을 정도로 영리하게 그었습니다. 당신 친구 나름 머리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네, 저는 조금씩 천천히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망가질 수 있는 곳까지는 망가져보려고 합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망가져보겠어요. 사람들이 그런 말을 곧잘 하기도 하죠.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해 봐라."
그래요, 리즈는 저 처럼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네요.
5월 10일.
리즈, 어째서일까요. 오늘도 계속해서 비가 오네요. 제가 있는 곳이 가끔 런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있는 동안 이렇게 오래 비가 온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말이죠. 눈은 자주 오지만. 그래도, 흐린 날이 계속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맑은 날이면 지루했을 텐데 말이죠.
전 여기서도 매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죠. 그곳에서도 매점 일을 하다 왔는데, 여기서도 결국 매점이라니. 전 매점과 얽힌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하느님이 저한테 매점 일로 대성하라고 얘기하는 걸까요. 운명이 편의점 점장이라면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글쎄요, 리즈. 일류가 있으려면 이류와 삼류가 있어야 하는 법이에요.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천개의 일상이 존재하죠. 멋지지 않나요?
5월 19일.
리즈, 좋은 저녁입니다. 오늘 이상한 전단지를 하나 보았습니다. 비슷한 류의 글들은 많이 보았지만, 저 전단지는 어쩐지 달라 보입니다. 조금은 진실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흥미로웠습니다. 전 전단지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는 편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게 이 일기를 끝낼 수 있다면 전 기꺼이 연락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요즘은 저런 일로 질 나쁜 장난을 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5월 20일.
연락이 닿았습니다. 내일 온다고 하네요. 어느 남자아이가 받았는데, 장난전화가 아니기를 빌 뿐입니다.
이미 늦었습니다만, 지금도 이게 잘 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끝내는 일이 옳은 걸까요. 어쩌면 저는 조금은 더 인상깊은 결말을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방식으로 도망치는건 무책임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눈 앞에 보이는 확실한 결말을 버린 채 더 이어나갈 용기가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5월 21일.
한시간 남았습니다. 리즈, 잘 있어요. 이 일기는 제 하드 드라이브 어딘가에 보관되겠죠. 쓰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줄이겠습니다. 이유는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날의 일기라는건 짧을 수록 좋은 거니까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보죠.
1부가 끝나기 전에 사연 하나만 더 읽어 볼까요. 이름.. 여러분, 이름으로 장난치는 솜씨가 진짜 고수네요. 이름 '침대 안의 벌레'분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웃음소리]
그거 진행자잖아요. 침대 안의 벌레. 이야, 구독자분이 진행자의 성향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캐스트였나요, 이 팟캐스트?
맞아요. 주말에 놀러가면 매일 감자칩의 산에 파묻혀있던데.
아무리 그래도 벌레는 아니죠. 벌레는 아니고.. 보자. 왜, 그걸 뭐라고 부르죠? 쓰레기 묻는 장소 있잖아요.
매립지?
네. 진행자씨는 침대 위의 매립지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요.
넘어가죠. 사연 읽어야 해요.
[웃음소리]
제 개인 생활정보는 이제 넘어가고, '침대 안의 벌레'분의 사연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유학중인 유학생입니다. 저는 이제 대학교 3학년이 되는데요, 며칠 전에 외장 하드 드라이브를 뒤지다가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정확히는 옛날 일기를 발견했어요. 일기는, 날짜로 짐작해서 보자면 대충 4년 전에 쓰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정리라고는 잘 해놓지 않기 때문에 이 파일이 여기까지 살아남은것도 굉장히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4년 전 일기라고요? 전 4년 전의 신청자분이 더 대단한 것 같은데요.
그래요, 저 분 유학생이라잖아요. 부럽다. 저런 부지런함이 없으면 유학을 갈 수 없는 걸까요.
네, 그래서 그레이씨가 유학을 못 간 겁니다.
[웃음소리]
진행자씨도 부지런함에 대해 딱히 말 할 자격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까도 얘기가 나왔지만, 휴일에 진행자씨 집에 놀러가본 분 많아요. 여기.
그거는 부지런함이 아니고 깨끗함의 척도죠.
부지런해야 깨끗해지는겁니다. 자꾸 핑계대지 마세요. 그레이씨가 지적했듯 진행자씨 이름을 매립지로 바꿔도 전혀 위화감이 안 들 만큼 방이 지저분하다고요.
[웃음소리]
오늘 일침이 날카롭네요. 어째 주제가 자꾸 저한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화제를 사연으로 옮기겠습니다.
진행자를 해치웠다! 자, 그레이씨. 하이파이브.
그래요, 하이파이브.
[박수소리]
계속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4년 전에 쓴 일기가 왜 남아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전 평소에 일기 잘 안 쓰거든요. 쓸 때도 굳이 컴퓨터 안에는 쓴 기억이 없고요. 저는 그래서 처음에는 남의 일기를 제가 다운로드 받은 줄 알았습니다. 옛날에 받았겠지 하는 그런 마인드 있잖아요. 최종 수정일도 대충 2년 전이었으니까요. 대학교 막 들어가고 이것저것 다운받을때 실수로 받았나, 하는 그런 심정이었죠.
그런 경험 많지 않나요?
실수로 다운로드 받는거요? 어휴. 말도 마요.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전 그거로 엄청 손해봤단 말입니다.
아, 맞다. 그랬죠? 그 '2010년 1학기 정치철학과 준비물품 목록'이었나요.
그거 무슨 얘기에요? 전 들은 적 없는데.
아차차. 실수. 그레이씨는 착한 어린이니까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우와, 이 방송 엄청 불건전한거였네요? 전 몰랐는데 말이죠.
[헛기침 소리]
오늘 게스트가 그레이씨인걸 까먹었네요. 이 주제는 그레이씨가 돌아가는 2부에서 다시 언급하죠.
전 그렇다면 헌법에 명시된 알 권리를 주장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신청자의 사연을 더 알 권리를 주장해서 이 상황을 넘어가죠.
현명한 진행입니다, 진행자씨.
자, 그럼 계속할게요.
근데 그 일기는 제가 실수로 받은 파일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실제로 쓴 일기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때 쓰기 시작해서 4학년 여름방학 중순쯤에 마무리되어있더군요. 문체도 제 문체였고, 무엇보다도 특정 부분을 제외하면 제 기억이랑 일치했습니다. 어, 그러니까 이제 사소한 부분들이요. 어느 고등학교를 나오고, 뭐에 관심이 있으며, 누구랑 주로 놀았는지 같은 일 있잖아요. 그런게 다 일치했어요. 딱 하나만 빼면. 여기서부터 이제 이상한 부분인데, 모든 일기의 첫 단어가 "리즈"라는 여자아이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 여자아이가 아예 기억에 없어요.
무섭다.
무섭네요 이거.
그래..요? 제가 이거 뽑았을 때에는 그렇게 많이 무섭지는 않았는데.
잠깐. 이거 진짜 무섭다고요. 진행자씨는 그런 기분 안 들어요? 거의 오늘 주제가 납량특집으로 바뀔 정도로 무섭단 말입니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은데.. 무섭다기보다는 슬픈 이야기 아니에요? 첫사랑을 까먹은 남자 정도의 느낌으로 생각했는데.
아니, 보통 그게 가능하지 않잖아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저 일기를 누가 써서 신청자의 외장하드에 숨겼다는 가설이 가장 적절한데, 그럼 저 '리즈'라는 사람이 매우 무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레이씨 말이 맞죠. 짝사랑하는 남자아이의 외장하드에 가짜 일기를 써서 숨겨놓을 수도 있는 거라고요. 가짜 기억을 심으려고. 얀데레네, 얀데레.
그런 얀데레가 존재할 가능성도 첫사랑을 잊어버리는 가능성에 비견할만큼 낮은 거 아니에요?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우선 사연을 더 읽어봐요. 더 읽으면 단서가 나오겠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어요. 7월 30일의 일기에요. "7월 30일. 리즈, 오랜만이에요. 주말 잘 지냈나요? 저는 잘 지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리즈라도 잘 보냈다면 좋겠네요. 오늘 프랑스어 시간에 살짝 방문했었죠. 지나가면서 본 얼굴은 즐거워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혹시라도 안 좋은 일 있다면 털어버려요.
세이렌의 노래라고 아나요? 노래는 아름답지만, 듣게 되면 점점 가까이 배를 몰다 결국 암초에 침몰하고 말지요. 후략."
에, [후략]? 더 들려주지. 아쉽네요.
일기가 거의 헌정 일기에 가까운데요? 이렇게 되면 역시 진행자씨의 가설이 더 맞게 되겠네요. 신청자, 혹시 중간에 사고라던가 당한 거 아니에요? 기억상실로.
로맨틱하다. 그래요, 이런 분위기라고요. 그레이씨가 생각하는 그런 으스스한 얀데레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전 낭만주의자란 말입니다!
확실히 문체로 봐서는 납량특집으로 보기 힘드네요. 더 읽어봅시다.
우우, 그럼 그레이씨가 읽어줘요. 목소리도 나보다 좋으면서. 이제는 지친다고요.
그럼 제가 읽도록 하죠.
예, 보시면 알겠지만 일기가 거의 '리즈'라는 여자아이에게 쓰여진 그런 느낌이었어요. 근데 이게 이상한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리즈'라는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조사를 조금 해 봤어요. 조사라고 해 봐야 졸업앨범에서 이름 찾는거에 불과하지만. 일기에 나름 신상정보가 적혀 있어서 몇가지 성과가 있었어요. 풀 네임이라던가, 나이 정도는 알았죠. 그걸 토대로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검색해봤습니다."
음,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왜 거기서 끊어요!
그레이씨 진짜 나쁘다.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당연히 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빨리 더 읽어요.
아니, 그거 뻔하잖아요. 페이스북에서 찾았으면 답이 나왔겠죠. 자기랑 예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우리 모두의 서스펜스를 위해서 이쯤에서 안 읽는게 좋은 선택 아닐까요?
그거 제가 뽑은거라고요. 전 그렇게 허술하게 사연 안 뽑는단 말이에요. 당연히 그렇게 안 끝나죠.
아, 그래요? 그럼 마저 읽을게요.
거기서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이 여자아이, 거의 세 달에 한번씩밖에 업데이트를 안 했어요. 더군다나 신상정보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죠. 대부분 일반적인 여자아이들의 게시물 ㅡ 왜, 있잖아요. "너네는 세계 최고의 친구들이야!" 같은 거. ㅡ 를 세달 간격으로 불규칙하고 짧게 올리는게 다였습니다.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의 대학교에 있는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이런 이유로 가는것도 매우 그렇죠. 전 절대로 스토커 같은거 아니니까요.
그렇죠. 4년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사람이 뜬금없이 이런 문제로 방문하는것도 영 좋은 그림은 아니죠.
동의합니다. 더군다나 남자잖아요. 모르는 오빠가 이상한 일기를 들고 와서 저런 질문을 하면 썩 좋지는 않아요. 전 로맨티스트로서 그런 결말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야 해요.
그건 좀 슬픈데요.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야 한다니. 전 해피엔딩 선호에요.
아니, 그래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잖아요. 딱히 옛날 기억이 있는게 아니니까요.
음.. 좀 더 읽어볼까요?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바꿔볼 그런 단서를 찾아봅시다. 그레이씨, 부탁해요.
다시 일기로 돌아갔어요. 좀 재미있는 말들이 있었죠. 제가 지금 옆에 끼고 하루에 세 병 마시는 애리조나 그린 티를 좋아하게 된 이유라던가. 오글거려서 딱히 적지는 않을게요. 여튼, 기묘하게 들어맞는 일들이 좀 있었어요. 저 애리조나 그린 티 이야기도 처음에는 소름끼쳤죠. 전 그냥 맛이 있어서 먹는 거였는데, 일기를 뒤져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으니까요. 그런걸 좀 보다가 후반부에 가서 진짜 단서를 찾았어요.
좋아하는 여자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음료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에는 없지만, 음료수만은 아직도.. 아아아. 녹는다 녹아.
로맨티스트 진행자씨는 맛이 가버렸네요. 원래 저런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글쎄요. 평소에는 매립지의 명성에 걸맞는 삶을 사는데. 방구석 로맨티스트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아요, 진행자씨. 정신 차려요.
사연 끝내주잖아요! 누가 뽑았는지 몰라도 참 잘 뽑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레이씨?
그 끝내주는 사연을 뽑은 사람이 너무 오바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침이 오늘따라 날카로운데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오늘 기말고사를 망쳤죠.
아, 이해합니다. 고등학생은 슬픈 법이네요. 우후후. 그레이씨의 고민은 저희에게는 추억이니까요.
으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빨리 넘어가요.
그럼 다시 읽을게요.
일기가 거의 끝날 무렵, 이상한 언급이 계속 되있었습니다. '전단지를 하나 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이걸로 끝낼 수 있다면 편해질거다.' 같은 말들이요. 그 언급이 시작하고 정확히 삼일 후에 일기가 끝났어요. 주말에 그 '전단지'에 관계된 장소에 가서 뭘 한 모양인데, 전혀 기억이 없네요. 모래성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거기서 뭘 했을까요?
끝. 좀 허무하네요. '전단지'라.. 글쎄요. 전단지에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안 나와있었나본데요. 추측으로 해 보자면, 저는 기억을 지워준다고 써져 있었을 거 같아요.
최면같은 방법으로요?
네. 그거 나름 유행했었잖아요. 전 그거 다 가짜인줄 알았는데 진짜도 있었나보네요. 그레이씨 생각은 어때요?
음, 전 좀 다르게 생각해요. 이걸로 끝낸다는 언급이 있었잖아요? 혹시, 신청자가 자살을 하려다가 부작용으로 기억을 잊은게 아닐까요?
과격한 발언인데요. 전단지에서 자살 광고같은거를 하게 내버려 둘까요?
아, 아뇨. 뭔가 최면은 좀 비과학적이니까요. 조금 더 개연성 있게 생각하자면, 집단 자살을 하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살아난 후에는 기억을 잊었다.. 가 타당하지 않을까 해서요. 로맨티스트 진행자씨의 생각도 듣고 싶은데요.
제 생각은 그레이씨가 가고 없는 2부에서 얘기하도록 하죠.
에? 왜요. 시간 없어서 그래요?
전 로맨티스트니까 매우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할 텐데, 그럼 그레이씨가 옆에서 계속 딴죽을 걸 게 틀림없잖아요.
[웃음소리]
시청자게시판에서 딴죽 걸 거에요. 이런다고 제가 안 할 것 같아요?
방송에만 안 나가면 되는 거에요. 자, 그럼. 저희는 짧게 신청곡 듣고 돌아오겠습니다. 신청곡, 라라 시기하라의 "Everything's Alright." 2부에서 뵐게요.